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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새벽 May 18. 2018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

-전새벽의 시집읽기, 도종환의 시 '내소사'



회사에서 봄맞이 워크숍에 다녀왔다. 일정 뻔하다. 등산복 따위를 입고 서울 근교로 출발해 숙소 근처에서 장을 본다, 숙소에 체크인한 뒤 잠깐 회사발전방향에 대해 토의하며 일하는 척을 한다, 그리고 불을 피우고 소주병을 비튼다.  
  
그런데 올해는 한 가지 다르게 하기로 했다. 회사발전방향에 대한 토의 대신, 각자 관심사에 대해 자유롭게 짧은 발표를 하기로 한 것이다. ‘여행하기 좋은 우리나라 지역들’이라든가, ‘동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같은 주제로 말이다. 
  
짝짝짝, 나는 손뼉을 쳤다. 안 그래도 머리가 굳어가는데 일 말고 다른 것에 대한 탐구 정신을 발휘할 기회가 얼마 만이냐. 그리고 야심 차게 준비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였다. 그러나 발표 준비를 시작하자마자 깨달았다. 아, 내가 예술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런 짓을 시작했지. 
  
코를 고는 아내가 딴 사람처럼 보일 때 
종종 그런 경험을 한다. 잘 안다고 믿었던 것들에 대해 사실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깨닫는 경험 말이다. 매일 살을 맞대는 아내가 다른 사람처럼 보일 때(이 사람이 코를 골다니!), 완전히 손에 익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업무에서 사고가 날 때(이런 규정이 있었다니!), 알레르기 검사를 했는데 감자 알레르기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을 때(감자튀김을 포기해야 한다니!) 말이다. 
  
이런 류의 경험은 대개 허탈함을 불러온다. 대체 여태 뭘 하고 살았던가 하고 한숨도 쉬게 된다. 그러나 성숙의 계기라고 믿는다. ‘성숙’은 대체 어디에 쓰느냐고? 바로 살가운 것을 똑바로 사랑하는 데 쓴다.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 
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 
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 
백의관음보살좌상 눈부처로 있었으므로 
단청 지운 맨얼굴을 사랑하였으므로 
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까 
-도종환, '내소사' 도입 부분 
  


현역 장관의 시다. 장관급 인사의 삶에는 더는 시적인 부분이 없지 않냐고 따질 분 계실지도 모르겠다. 하나 ‘높으신 분’이 되기 전에 쓴 글이니 편견 없이 읽어 보자. 
  
내소사는 전북 부안에 있는 사찰이다. 시인은 그곳에 대해 아는 체를 한다. 그곳에는 삼층석탑과 보살좌상 벽화가 볼거리임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가 은근하게 내세우는 ‘눈부처’란 상대방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일컫는 우리말이다. 시인은 보살좌상 그림의 눈에 자신이 비칠 만큼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깊고 긴 숲 지나 
요사채 안쪽까지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나는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 
능가산 품에 깃들여 고즈넉할 때는 나도 
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 
다 안다고 말하곤 하였다 
-같은 시, 중간 부분 
  
‘요사채’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집이다. 그 안쪽까지 드나들었다니 시인은 예사 관광객 취급을 받지는 않았나 보다. 하지만 계속해서 떠들려니 자신감이 없어진 모양일까. 시인, 돌연 자괴감을 내비친다. 

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 
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 
그의 오래된 내상과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 
그가 왜 직소폭포 같은 걸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 
그의 내면 곳곳이 왜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면서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곁에 사월 꽃등 행렬 가득하였으므로 
그의 기둥과 주춧돌 하나까지 사랑스러웠으므로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해 기울면 그의 그리움이 
어느 산기슭과 벼랑을 헤매다 오는지 알지 못하면서 
포 하나가 채워지지 않은 그의 법당이 
몇백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의 흐느낌 그의 살에 떨어진 촛농을 모르면서 
-같은 시, 끝부분 
  
시인은 사실 알지 못했다. 내소사가 입은 내상과 해가 진 뒤 그곳의 쓸쓸한 풍경에 대해서. 직소폭포는 내소사 인근의 폭포 이름이다. 시인은 이 멋들어진 사찰 안에 어찌하여 깎아지른 절벽들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마지막 행은 그야말로 시의 완성이다. ‘흐느낌’과 ‘살에 떨어진 촛농’이란 시어에 담긴 애환이 가볍지 않다.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채 감히 사랑 운운했던 시인의 자괴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간 얼마나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을 함부로 사랑한다고 떠들고 다녔나. 한편 위의 시가 가슴으로 들어온다면 함께 읽기 좋은 텍스트가 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너를 어떤 느낌으로 적시는지를 모른다. 너를 관통하는 그 모든 느낌을 나는 장악하지 못한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전부일지 모를 그 느낌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신형철, ‘시뮬라르크를 사랑해’ (김행숙 시집 『이별의 능력』해설) 중 
  
우리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대체 얼마나 될까? 기껏해야 몇 시간 후면 또 공복에 시달릴 거란 사실 정도인지도 모른다. 그런 주제에 감히 ‘예술’이라니! 결국 워크숍의 발표주제는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최근 재미있게 읽은 에세이집 한 권을 무난하게 소개하고 끝냈다. 그래, 애초에 그 정도가 좋았는지도 모른다. 
살면서 점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든다. 적잖이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슬픔에만 잠겨 있지는 말자. 다시 말하건대, 우리는 그것을 성숙이라 
고 부르자. 아픈 성숙을 통해 나는 방법을 찾아 나갈 것이다. 시와 예술과, 당신을 오롯이 사랑하는 방법을. 
  

2018. 05. 17 중앙일보 더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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