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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새벽 Dec 14. 2018

나플라에게는 없고 오르내림에게는 있는 것

'브레이킹 배드'와 힙합의 가치


사진은 '브레이킹 배드'와 상관 없다. 오르내림의 'OH YEAH' 뮤비의 한 장면이다.

한 번에 꽂혔다. 오랜만이다. SMTM 777을 통해 나플라라는 굉장한 발견을 한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보석을 하나 더 찾았다. 

아직 이러한 찬사가 '오르내림'이라는 래퍼 개인을 향해도 될지는 모르겠다. 그에게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거다. 아직 젊고, 포트폴리오가 얇다. (오르내림은 1996년 생이다.)  하지만 이 한 곡, '브레이킹 배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칭찬하고 싶다. 조금 호들갑스럽게 말하자면, 오르내림은 이 한 개의 트랙으로 힙합의 가치를 다시 입증했다.

그런지록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커트 코베인의 등장부터가 '신약', 그 이전은 '구약'이 되는 것처럼, 랩 음악을 투팍 전후로 나누는 것, 큰 무리 없으리라고 본다. 1971년 생인 투팍 샤커는 백인 경찰이 지나가는 흑인만 보면 일단 검문을 하고, 반항하면 때리는 걸 보면서 자란 세대였다. 그런 그의 가사 속에 엄청나게 많은 'FUCK'이 있었던 건 당연한 일 아닐까.

2000년 대 들어 힙합씬은 테마를 바꿨다. 랩 음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스타들이 미디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흑인 래퍼들은 더 이상 소외 계층이 아니라 포브스가 다루는 자산가였다. 힙합은 이때 나르시즘에 빠졌다. 먹고 놀고 돈 쓰고 여자를 거느리고 취하자, 라는 메시지가 전세계에 울려 퍼졌다. (근데 그걸 메시지라고 할 수 있나?) 주동자는 넬리 등이었다.

힙합이 한(恨)의 표출이 아니라 놀자판이 됐다. 하지만 슈퍼카와 대저택이 등장하는 뮤직 비디오도 끝내 시들해졌다. 2010년대에 들어와 힙합은 갈 길을 잃었다. 그동안 배고프고 서러웠으니까 원 없이 춤추고 놀았는데, 놀 것 다 놀고 나니까 할 게 없었다. 본토가 그러할진데 한국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리 없었다. 한국형 힙합이니 크로스오버니 여러 시도들이 있었지만 결실은 없었다. 나는 이 시기에 힙합과 잠시 거리를 뒀다. 그런데 2012년에 새로운 판이 열렸다. 전설의 시작, SMTM 시즌 원이 시작된 거다.

여기서 잠깐 고백. 나는 역대 SMTM을 거의 안 봤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쓸 자격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좋은 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매니아끼리만 알아 듣는 물 속 깊은 얘기가 아니라, 모두 알아 듣는 수준으로 애기할 수 있을테니까. 모두가 알만한 사건으로는 역시 그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스윙스. 오디션 당시 그의 무반주 랩을 듣고 혀를 내두르지 않은 이가 없었다. 모두가 그의 전투력, 실력, 배짱에 박수를 쳤다. 그리고 스윙스의 등장은, 이미 씬에서 한 가닥 한다는 사람들을 SMTM으로 불러 들였다. 이미 앨범도 냈는데, 나 팬도 많은데, 하는 자존심 내려놓고, 이미 검증받은 실력자들이 다시 기름기 빼고 칼을 갈아 모였다. SMTM은 이제 입구가 되었다. 판은 큰데 입구가 하나이니 출입하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스윙스가 판을 흔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컨트롤 비트 사태가 터졌다.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이 전부 입에 총알을 장전하고 조정간을 '연사'에 놓았다. 이 때가 한국힙합씬에서 제일 재밌는 시기였다는 것에는 많은 리스너들이 동조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간만에 목대에 핏세우는 래핑들이 연일 화제되며, 또 한편으로는 촌극처럼 지나가고, 정신차려 보니 힙합씬이 활황기였다. 레이블 자체가 몇 안 되던 이곳에 여러 진영이 각자의 색깔을 가지고 포진했다. 이 진영들의 수장들이 대부분 젊다는 것도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 건설적인 발전에 SMTM이 기여한 바는 상당히 클 것이다.

씬은 커졌는데 문제는 내실이었다. 열심히 듣고 연습한 건 알겠는데, 책 읽고 사색하며 철학을 쌓아온 느낌이 드는 래퍼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신예들에 한해서는 그렇다는 얘기다.) 사실 철학 같은 거 필요없으니까, 리듬 말고 맛깔난 가사로 승부할 수 있는 래퍼 하나만 있어도 되었다. 맛깔난 가사는 사색을 통해 완성된다. 하지만 젊은 래퍼들은 통 사색할 시간이 없었다. 내용은 없어도 되니까 리듬만 더 잘타면 돼, 가사는 이왕이면 자극적으로, 결국은 스웩! 짧은 시간에 심사위원과 관객에게 인상을 남겨야 하는 오디션 문화가 래퍼들을 더욱 부추겼다. 아이러니하게 SMTM은 이 손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 SMTM이 777으로 돌아왔다. 첫 시즌 때, 그러니까 후니훈이나 미료 같은 출연진들이 심사위원 자격논란에 시달리며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던 그때, 이 방송이 7년이나 이어질 줄 제작진, 예상이나 했을까. 

감격스런 성공을 자축하기라도 하듯, 777은 초장부터 괴물을 내보냈다. LA에서 온 이 핑크색 머리의 젊은이는 등장과 동시에 현장과 시청자를 압도했다. 어느새 심사위원 중에서도 고참인 더콰이엇은 "이런 퀄리티 있는 랩을 들을 수 있게 해준 쇼미더머니에 감사한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나플라의 발견은 확실히 굉장한 것이었다. 우탱클랜을 들으며 자란 나는 그의 'Wu'라는 트랙 때문에 한동안 트와이스에게 소홀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플라, 가사가 없다. 그의 어휘들은 모두 소리만을 염두에 두고 고른 것 같다. 아, 힙합은 아직도 길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브레이킹 배드'를 만나게 됐다. 나플라가 등장한 첫방 이후 시간이 없어 방송도 보지 못하던 상태에서, 음원으로 먼저 오르내림을 만났다. 이 트랙, 일단 음악이 좋다. 힙합이 아니라 팝이다. 그런데 래퍼가 뱉기 시작하는 가사가 눈을 번쩍 뜨게 한다.

  날 학교 다닐 때 왕따시킨 애들은 PC방에서 아르바이트 (1시간에 천 원)
  난 걔네 월급을 목을 풀며 벌고 주문해 라면에 콜라까지 (너무 맛있어)
  난 너가 간 고등학교를 피해서 진학했어, 넌 길거리에 울리는 내 노래를 피해 걸어줘


이거였다. 내가 힙합에게서 기대한 건. 혁명이니 철학이니까지 기대한 게 아니었다. 대상이 분명한 디스, 매콤하기만한 디스가 아니라 유머를 풀어 고소하기까지한 디스 (라면 국물에 우유를 조금 넣는 것과 같다), 풍자, 위트, 그런 것이었다.


너네는 야간알바하니까 날 모니터로 보겠다


학창시절 괴롭히던 놈들에 대한 복수. 그런 주제라면 FUCK이 먼저 나오는게 듣는 쪽에서도 기대한 바였을 거다. 오르내림은 그렇게 하는 대신 원수들의 근황을 먼저 차분하게 전한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위치를 설명하며 이제는 바뀌어버린 갑을관계가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잘 지내나요 그댄 어딨나요, 그댄 너무 밑에 있어 보이질 않아요


피쳐링을 맡은 기리보이는 공격의 대상을 '그대'라고 부른다. 게다가 '어딨나요'라며 존칭까지 한다. 적에게 존칭을 할 수 있는 건 프리더 정도인 줄 알았는데, 놀랍다. 그런데 이어지는 디스, ' 그댄 너무 밑에 있어 보이질 않아요'가 날카롭게 적의 폐부를 뚫는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관객, 이것이 선혈이 낭자하는 호러액션이 아니라, 웃음과 탄성이 나오는 블랙코미디인 것을 절감한다.

'Breaking bad, 나쁜 것들을 깨부셔'라는 후렴구는 이 곡의 가치를 한층 더 끌어올린다. 왕따 시켰던 애들 걔네한테만 하는 얘기가 아니고, 애들 괴롭히는 못된 놈들 전부를 향해 던지는 말이다. 개인적인 아픔을 영민하게 소재로 쓰면서 유머를 잃지 않았고 사회 전체에게 메시지까지 던졌다. 그걸 전부 한 트랙으로 해냈다. 홀인원이다.

777에 프로듀서로 등장한 기리보이는 부담도 됐을 거다. 자신한테는 더콰이엇 같은 명성도, 팔로알토 같은 연륜도 없으니까. 그래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뭔가를 과시하려들지 않고, '맴매 맴매 맴매,,때때때때때려,' 하면서 리듬감에 흥취만 더 돋군다. 오르내림이 소고기 등심이고, 자신은 위에 뿌려지는 파슬리가 되기로 했다. 이 디쉬, 너무 맛있다. 이 디스, 너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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