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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새벽 Dec 14. 2018

아무 문장이나, 황인숙을 읽을 때

황인숙 시인의 <아무 날이나 저녁때>에 부쳐



1
 
온종일 
저녁 같은

 
창밖 멀리 하늘,
그 아래 건물들도
어딘지
삭아가는
시멘트 빛
 
아, 정작
저녁이 오니
건물들의 희게 빛나네
하늘과 함께
건강함의 진부함을
뽐내네
 
2
 
어제 우연히 발견한
10년은 족히 지난 너의 메모
좋은 펜으로 썼나봐
글자가 선명하네
‘아무 날이나 저녁때’
 
내게 아직
진부하게도
저녁이 있었을 때
아무 날이나
저녁 때
-황인숙, ‘아무 날이나 저녁때’ 전문
 





1
 
어떤 평론에서 읽은 적 있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는데 대충 이런 말이었다. 서정성을 드러내는 건 초보문학가나 할 일이라는 말. 당시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완숙한 문학가는 서정성을 뽐내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은 법이지. 하지만 위의 시 같은 작품들을 마주할 때 나는 끄덕임을 취소하고 싶어진다. 
 
2
 
제 1연에서 시인은 장난을 친다. 시를 쓴다고 말해놓고 사실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온종일’과 ‘저녁 같은’ 과 ‘날’이 각각 다른 행일 이유 뭐가 있나. 하지만 시인은 그렇게 했다. 단어를 배열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 그림은 중요한 정보를 내포하는 픽토그램(pictogram)이다. 천천히 읽으세요, 라고 말하듯이. 시 낭독에는 통 재주없는 나에게도 시의 템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문득 나는 지은이가 고양이 시인이라 불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래, 졸린 고양이 기지개 켜듯이 느릿느릿, 힘을 빼고,
 
조금

읽는다
 
3연에서 드디어, 시인은 반짝임을 마주했다. 우중충하던 시멘트 빛 도심이 저녁 때 이르러 빛을 내기 시작한다. 그 건강한 반짝임을 두고 시인은 진부하다며 너스레를 떤다. 사실은 들뜬 주제에, 짐짓 쿨한 척 애쓴다. 그렇지 않으면 온 마음을 빼앗겨 버릴까봐 그랬겠지. 호들갑스럽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겠지. “지금 창 밖이 너무 예쁘지? ”라고 말했다가 취한 사람 취급을 당할 수도 있었겠지. 아니면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엉엉 울었을 지도 모르지. 그러지 않기 위해, 너스레를 떨었겠지. 
 
그 너스레는 복선이다. '2'의 1연에서도 시인은 너스레를 떤다. 이번 너스레가 진짜다. 이번 너스레가 진짜인 이유는 오래된 메모를 발견한 흥분이 반짝이는 도시를 마주했을 때의 그것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같은 책에 실린 어떤 시에서 안희연은 '압정 같은 기억(슈톨렌-현진에게)'이라고 했다. 황인숙에게 이 메모는 압정 같은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찔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번에도 마음을 애써 감춘다. ‘좋은 펜으로 썼나봐’라며 얘기를 딴데로 돌린다. ‘진부하게도/저녁이 있었을 때’라고 말해버린다. 그렇지 않으면, 엉엉 울었을 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메모를 쓴 사람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무 날이나 저녁 때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아무 날이나 저녁 때, 빌려갔던 반찬통을 돌려달라던 것일까? 그 김에 만나자고 했던 것일까? 만나서 반찬통도 돌려 받고, 시인을 한번 안아주고 오겠다는 생각이었을까? 둘에게는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아무래도 관계없다. 다 지난 일인걸. 그것은 우리에게 아직 진부하게도, 애틋함이란 게 남아 있었을 때의 일인 걸. 하지만 그 시간으로부터 꽤 멀어진 지금의 나조차, 가끔씩 그런 서정성에 취해 흥분할 때가 있다. 

어느때?  

아무 문장이나, 황인숙을 읽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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