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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새벽 Dec 14. 2018

스푸트니크의 숙적

영화 <독전>




우주선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발사된다
우주경쟁 시대, 미-소의 에피소드는 창작자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불어 넣었다. 최근의 영화 중에서도 몇 가지가 눈에 띈다. <셰이프 오브 워터>가 그랬고 <히든 피겨스>가 그랬다. 오늘 본 영화, 거기에 끼워 넣는다면 너무 갔다고 하시려나.

1957년, 최초의 무인인공위성 발사 성공으로 잔뜩 고무된 소련은 한번 더 세계를 놀래키기로 한다. 이번에 준비한 발사체의 이름은 '스푸트니크 2호.' 전작의 이름에서 숫자만 다르게 매긴것이었다. 하지만 이 우주선에는 놀라운 것이 담겨져 있었다. 살아있는 생물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개의 이름은 라이카였다.


원호가 차를 몰고 가고 있다. 롱샷에서 비춘 풍경은 온통 눈뿐인 길. 사방이 눈으로 덮인 이국적인 풍경을 보면서 관객은 그곳이 한국과 꽤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걸 짐작케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대체 이 남자를 이 먼 땅까지 부른 것은 무엇일까.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형사 원호는 햄버거집에서 수정과 접선한다. 짤막한 그들의 대화는 관객에게 3가지 정보를 재빨리 전달한다. 수정은 마약을 하다가 소년원에 갔었던 십 대 여자, 원호는 (아마)그 수정을 체포했던 형사라는 것. 그리고 원호가 수정을 한 마약관련 수사의 유인책으로 쓰고 있다는 것. 

결행일날, 원호는 수정으로부터 사진을 하나 받는다. 주차장의 기둥번호가 찍힌 사진을 보고 달려간 그곳에는 수정이 쓰려져 있다. 긴급하게 병원으로 후송된 수정은 원호가 내민 종이에 힘겹게 8자를 그리고 죽는다.

인간적인 정을 느꼈던 수정이 마약조직에 의해 목숨을 잃자 원호는 수사에 대한 더욱 강한 의지를 불태운다. 그때 마침 큰 기회가 찾아온다. 마약계를 점령한 의문의 거물 '이선생'이 소유한 마약공장에서 원인불명의 폭발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폭발에 휩쓸려 죽을 뻔했던 오연옥은 이선생에게 앙심을 품고 원호를 찾아온다. 정보를 제공할테니 본인을 숨겨달라고 한 오연옥은 원호에게 이선생의 본명을 채 털어놓기도 전에 독살당한다. 

한편 폭발된 마약공장에서는 두 개의 산 목숨이 발견된다. 하나는 가엾게도 극심한 화상을 입은 개, 하나는 공장 옆에 붙어 살며 공장 일을 돕던 스물여덟 청년 서영락이다. 원호는 서영락을 이용해 이번에야 말로 이선생을 잡기로 하고, 서영락을 따라 중국 바이어인 진하림을 만나러 간다. 

여기쯤에서 한번 언급할 것이 있다. <독전>의 연출과 편집이 바로 그것이다. 속도감 있는 커트와 강력한 사운드가 상당히 박진감 넘친다. 개인적으로 한국영화를 보면서 음악에 감탄한 적은 거의 전무한데, 이 영화, 음악이 참 잘됐다. 무게감 있게 도입부를 끌고 나가는 배우 조진웅의 열연도 관객으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관객은 여흥을 끝내고 잔뜩 움츠러둘 수 밖에 없다.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이도록 그리운 배우가 눈앞에 등장했기에, 그리고 그가 연기하는 끝을 알 수 없는 광기가 정말로 심상치 않기에.

이선생 조직에게 원재료를 대고 그 원재료로 만들어진 최상품 마약을 다시 중국으로 가져가려는 진하림. 피묻은 손으로 악수를 건네는 그는 그야말로 광인이다. 광인인 것만으로도 무서운데 더욱 우리를 긴장케 하는 것은 그가 원호 무리를 끊임없이 의심한다는 것이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원호 일행은 보고 배운 것을 토대로 진하림인 척 흉내내 이선생 조직과 접선한다. 

여기까지 참 여러 장르의 요소가 섞였다. 집요하게 한 인물을 좇는 수사팀의 드라마, 폭발과 폭력의 카타르시스가 끓어넘치는 액션, 그리고 케이퍼 무비가 주로 선보이는 기발한 트릭들. 단, 그 트릭이 도둑들이 아닌 형사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은 다르지만.

머리깨나 쓴 수사팀은 머리쓴 게 무색하게 유리잔으로 얻어맞고, 마약을 억지로 삼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겨우 수사를 한 발 진전시킨다. 이제 이선생을 무대로 끌어내는 일만 남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거쳐야 할 관문이 있다. 바로 서영락을 따라 태안의 마약공장으로 가 진하림이 제공한 원재료로 상품급 마약 '라이카'를 만드는 것. 원호 입장에서는 서영락이 영 못미덥지만 어쩔 수 없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랴, 콧물이든 마약이든 입으로 삼키면서라도 취사를 끝내야지.

아래부터 영화 <독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안의 공장으로 가는 길, 풍력발전소의 날개가 태평하게 돌아가고 햇살을 받은 염전의 수면이 반짝이는 그곳을 보며 관객은 잠시 놀러온 기분이다. 피비릿내 가득한 수사물에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들을 집어 넣는 건 사실은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감독의 은밀한 메시지인가.

공장씬에서 가장 압도적인 흡입력을 발휘하는 건 단연 농아 기술자들의 존재다. 문신으로 가득한 몸과 고인을 애도하는 순정과 서영락과 주고 받는 순박한 웃음을 보면 그들이 악역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다. 하지만 무엇보다 보고듣는 재미를 연출하는 건 바로 마약제조씬. 귀가 찢어질듯한 볼륨으로 간신히 음악을 듣는 귀머거리 기술자들의 작업 장면은 MTV급 시퀀스다. 여기서 장르 하나 더 추가. <독전>은 이제 약간 괴기한 테크노 뮤직비디오의 요소까지 가져간다.

잘 왔는데, 여기까지 정말 잘 왔는데 다된 밥에 코가 살짝 떨어진다. 브라이언의 등장 때문이다. 단발머리에 콧수염을 한 재벌 2세이자 마약조직 임원이라니, 조진웅과 그의 팀이 간신히 만들어 온 현실성에 갑자기 만찢남이 등장해 극은 만화가 된다. 게다가 브라이언은 서영락을 팀에서 빼라고 하지 않나. 영화의 몰입도를 망친 브라이언은 원호의 수사까지 망치게 생겼다. 게다가 브라이언과 다시 만난 용산역의 마약제조현장에서 벌어지는 전투(?)씬은 그야말로 만화다. 이해영 감독, '변호사가 어벤져스 급'이란 대사를 쓰더니 진짜 어벤져스 흉내라도 내고 싶었나. 다른 것들은 웬만큼 봐주겠는데 여형사와 여자조직원의 스커트 결투씬은 대체 뭐란 말인가. <네이키드 웨폰>을 너무 좋아하셨던 건 아닌지.

많이 아쉬운 전투에 구원군이 등장한다. 농아기술자들이 방독면을 쓰고 총질하며 등장한 것이다. 다시 못보면 어쩌나 아쉬운 캐릭터들이었는데 반가웠다. 반가운 그들이 등장해 브라이언도 응징해주고 원호도 살길을 찾는다. 그리고 이제 대망의 결말. 이선생의 충격적인 정체가 들어나면서 영화는 어려운 끝을 찾아간다.

이선생의 정체를 알았지만 수사팀은 그를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조차 모른다. 이름미상, 국적불명. 말 그대로 알 수 없는 존재다. 알 수 없는 존재인 이선생은 도주에 성공하고 경찰은 브라이언이 이선생이었고 그 일당을 전부 소탕했다고 발표한다. 무기력함과 허무함에 지쳐버린 수사팀. 원호는 공무원증을 반납하고(이런 클리셰는 대체 몇년도에 어느 감독을 끝으로 사라질까?) 떠난다. 삐빅삐빅, 라이카의 몸속에 숨겨둔 GPS가 이선생이 있는 곳을 안내하고 있다.

온통 눈으로 덮인 그곳. 길을 달려 마침내 GPS의 위치에 이르렀다. 원호가 "라이카!"하고 부르자 개가 뛰어나온다. 다행히 다 나은 듯하다. 농아 기술자들도 나와 놀란 표정으로 원호를 맞는다. 곧이어 등장하는 이선생. 아니 서영락. 아니, 그는 대체 뭘까. 밀입국하던 컨테이너에서 부모를 잃고 소박한 가정에서 길러진 그를 대체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정체를 알지 못하는 적을 앞에 두고 원호는 눈물을 머금는다. 눈물을 머금고 "너 행복한 적이 있었냐"고 묻는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숙적은 상념에 잠긴다. 누군가는 상대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다. 관객이 둘에게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면 좋을지 채 결정하기도 전에 총소리 탕! 하고 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라이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수작이다. 명작은 아니어도 수작쯤은 된다. 액션, 시나리오, 연출 면에서 많은 가능성을 봤다. 무엇보다 가장 매력적인 것은 살아있는 캐릭터들이다. 콧수염난 아저씨 말고는 전부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제작진도 꽤 자신이 있었는지 제목을 '독전'이라고 지었다. 중화권에서 영화를 잔뜩 팔겠다는 기대와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제목으로서는 영어로된 BELIEVER가 더 낫다는 생각이다. 작품에서 굳이 인문학적 요소를 꼽으라면 그 키워드는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신학대학을 나온 콧수염 아저씨의 믿음론은 거품이라고 치더라도 자신이 좇는 존재가 철저한 악마일 것이라고 여겼던 원호의 믿음이 배신 당하는 아이러니도 그렇고, 반면에 아무것도 믿을 것 없이 자란 이선생의 공허한 마음이 우리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악의 공허함을 내비쳤으므로 영화는 필연적으로 열린 결말이 된다. 관객은 이제 적어도 네 가지 결말을 떠올릴 수 있다. 이선생이 재빠르게 원호를 쐈을 것이란 결말, 원호가 마침내 이선생을 끝장냈다는 결말, 이선생이 자살을 했을 것이란 결말, 혹은 설명하기 어려운 어떠한 절망감을 느낀 원호가 허공에다 총을 한 발 갈겼을 것이란 결말. 영화가 열린 결말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관객이 이선생에게 연민을 품었기 때문이다. 악이 철저하게 악으로 남지 않고 관객과 교감해버리면, 관객은 그가 체포되는게 영 찜찜해진다. 그러니 피흘리며 쓰러지는 이선생의 모습은 적절한 결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떡하느냐? 모르겠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태평하게 눈싸움을 하는 농아 남매들처럼, 그저 깔깔 웃으며 이 모든 것들을 뒤로할 수 밖에.

스푸트니크 2호에 탔던 라이카는 원래 떠돌이 개였다. 라이카는 개에게 생긴 첫 이름일 것이다. 소련의 연구원들은 개를 우주로 내보내기 위해 정성껏 개를 돌봤을 것이다. 이선생이 극중에서 원호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는 원호를 형사님, 이 아닌 "팀장님"이라고 부르고, 자신도 예측못한 수사팀원의 죽음에 허탈해한다. 그는 어쩌면 정체불명의 악당이 아닌 누군가와 연결된 팀원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런 라이카의 심정을 노래한 글을 한 편 싣는다. 감성과 재치를 모두 겸비한 한 만화가의 수작이다. 

1957년, 모스크바 시내를 떠돌던 개가 있었다.
이름은 없었다. 그저 떠돌이 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과학자가 떠돌이 개에게 다가왔다.
과학자는 떠돌이 개에게 '라이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짖는 녀석'이라는 뜻이었다. 아마도, 라이카는 처음 생긴 이름이 좋았을 것이다.
(...)
기록에 따르면, 스푸트니크 2호가 대기권을 벗어나기 전 라이카의 심박수는
평상시의 두 배 이상이었지만, 대기권을 벗어난 뒤 정상 심박수로 돌아왔다고 한다.
로켓의 꼭지가 벗겨지는 과정에 결함이 생겨
기내 온도가 40도까지 올랐어도 라이카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으며,
무중력 상태가 된 지 세 시간 뒤 라이카는 과학자들이 준비한 음식을 먹었고
지구를 벗어난 뒤 여섯 시간 후 더 이상의 생존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라이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김보통, <아만자> 3권 중



위의 라이카에 대한 이야기가 이선생의 심정으로 읽힌다면 한 가지 글을 더 읽어도 좋다. 
<독전>의 결말이 뭐가 됐든 관객이 쓸쓸함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는 이유, 어느샌가 동반자였던 이선생을 눈앞에 두고 원호가 감정을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 글에 들어있다.

"당신은 스푸트니크라는 말이 러시아어로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건 영어로 travelling companion이라는 뜻이에요. '여행의 동반자.' 생각해 보면 묘한 부합이죠. 하지만 어째서 러시아인은 인공위성에 그런 기묘한 이름을 붙였을까요. 외톨이로 빙글빙글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불쌍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데.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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