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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새벽 Dec 14. 2018

너무 늦게 안아줘서 미안해요

-영화 <여중생A>





1. 꽉 찬 마음과 핑계 하나
평을 의뢰 받고 시사회에 다녀왔다. 관람한 작품은 동명의 네이버 웹툰으로 널리 알려진 <여중생 A>. 배우도 감독도 어느 것 하나 크게 기대하는 마음 없이 갔다가, 마음을 꽉꽉 채워 집으로 돌아왔다. 말하자면, 114분 동안 안겨 있던 느낌이랄까.

원작이 따로 있는 영화를 소개할 때는 두 가지 노선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 원작과의 비교를 뼈대로 하는 노선, 그리고 원작은 싹 잊고 가는 노선. 나는 늘 후자를 택한다. 원작이 있다 하더라도 재해석된 작품은 분명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편이 사실 원작은 찾아보지 못하게 만든 게으름을 가릴 수 있는 좋은 핑계라서.

2. <여중생 A>, 줄거리
여기, 사랑과 웃음과 예술을 잃어버린 소녀가 하나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사랑은 친구에게 뺏겼고, 웃음은 주폭 아버지가 앗아갔으며 예술은 아까 그 친구가 같이 빼앗아갔다. 모든 것을 잃은 소녀는 학교 옥상에서 떨어진다. 가엾은 소녀의 이름은 '장미래.'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 미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미래는 왕따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가 주폭이라는 게 소문나서? 집이 가난해서? 아니면 괴롭혀도 크게 저항하지 않아서? 어쩌면 괴롭히는 쪽도 모를 수도. 이유가 불분명한 괴롭힘 속에, 미래는 혼자서 점심을 삼킨다. 유일하게 마음이 편한 곳, 도서관에서. 




도서관에서 혼자 책을 읽는 것 외에 미래가 좋아하는 건 두 가지 정도다. 글쓰기와 게임이다. RPG게임인 <원더링 월드>에서는 사람들과 편견없이 얘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과도기다. 2005년, 비디오를 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발빠른 사람들은 이미 DVD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었다. <원더링 월드> 역시 빠른 속도로 개선되고 있는 고사양 MMORPG들의 등살을 이겨내가기 어려웠을 거다. 결국 게임은 서비스 종료를 고지했고, 자신만의 안전한 세계를 잃어버린 미래는 깊이 낙심한다. 

세상도 과도기인데, 중학생 청소년들은 인생의 과도기까지 함께 겪고 있다. 들끓는 에너지를 어찌해야할지  몰라,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남을 괴롭혔다. 괴롭히는 놈들은 마치 남을 괴롭히는 일을 '오늘의 할 일'처럼 하고 다녔다. 교실은 그렇게 3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주도적으로 누군가를 괴롭히는 녀석, 주도자에게 동조하여 무리를 짓는 녀석들, 그 괴롭힘을 당하는 녀석. 아, 거기에 하나 추가. 선생님도 있다. 선생님은 어떤 쪽? 군자의 덕을 그저 '방관하는 것'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난(蘭)과의 사랑에 빠져 "조용히 지내자"며 침묵을 요구하는 그런 쪽.



애들은 괴롭히지, 게임은 종료됐지, 한숨만 쉬는 미래 앞에 구원투수가 등장한다. 공부 잘하고 예쁘고 글 잘쓰는 반장 '이백합'이 그 주인공. 백합은 미래의 글쓰기에 관심을 보이고 곧 미래의 단짝을 자처한다. 친구가 생긴 미래는 조금씩 웃음을 되찾아가는데, 일이 잘 풀릴 모양인지 '사랑'도 다가온다. 훤칠한 외모에 드럼까지 치기 시작해 더욱 빛나 보이는 '이태양'을 보며 미래는 들뜬 일상을 보낸다.

친구와 사랑이 생겼지만 여전히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할 상대가 없다. 백합과는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는 중이고, 태양에게는 아직 고백도 하지 못한 상황이니까. 그래서 미래는 <원더링 월드>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곧잘 들어주던 길드원을 찾아간다. 거리에서 탈을 쓰고 프리허그를 하고 있는 길드원. 그 이는 커다란 인형을 벗지도 않고 묵묵히 미래의 얘기를 들어준다.





봄이 오는가 했더니 별안간 폭풍우가 몰아친다. 백합은 미래의 소설 아이디어를 전부 빼앗아 공모전에 내버렸다. 표절시비가 붙자 백합은 뻔뻔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미래의 얼굴을 빨갛게 달아오르게 했던 태양은 알고보니 그런 백합을 좋아하고 있었다. 서러움과 분함으로 가득찬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지친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건 가난과 폭력. 생리대 하나 살 돈이 없는 이 가엾는 소녀는 이제 죽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죽기 전에 인사를 해야할 사람이 누굴까. 미래에게는 게임에서 만난 친구가 다다. 인사를 하러 왔다는 말에 인형탈은 비로소 탈을 벗는다. 탈을 벗고 모습을 드러낸 건 꽃미남 '재희.' 재희는 미래에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하라' 며 버킷리스트 작성을 권유한다. 소녀가 목숨을 끊겠다는데 어찌 그리 태연한가, 하고 보니 재희도 역시 죽을 결심을 하고 버킷리스트들을 실행중이란다. 외모는 눈부시지만 속은 까맣게 타버린듯한 성인 남자 재희, 사랑과 웃음과 예술을 잃고 삶의 의지마저 잃어버린 여중생 미래. 둘은 현실에서 다시 길드를 결성,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들을 함께 해나가는데...

3. 그래서 좋았어, 별로였어? 라고 묻는다면
우선 영화의 느린 속도가 참 마음에 들었다. 이런 속도로 누군가를 관찰하는 거, 참 오랜만이다. 두 번째로는 배우들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주연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한 여배우, "뭣이 중헌디" 이후로 많이 성장했다. 여전히 발군의 연기력이다. 후반부에서 그녀가 오열하는 장면은 역대 가장 가슴 아픈 눈물씬 2위에 올려두었다. (1위는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배우 양동근이 밥 먹다가 뛰쳐나가 대문 앞에서 우는 장면) 조연들도 귀중한 발견이었다. 도드라지는 외모의 정다빈(백합 역), 더욱 도드라지는 외모의 김준면(재희 역), 그리고 그들의 연기가 위로가 된다는 것. 극의 분위기를 리딩하는 어른 배우 하나 없이 저희들끼리 해냈다는 것.


4. 감히 평을 해본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나쁜 길로 가고 있음을 아시고 인류에게 한 가지 능력을 더 주셨습니다." 
"그게 뭐죠?" 
"의식입니다. 이 의식이 있기에 인간은 세 가지 특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위선과 잔혹성과 악의 말인가요?" 
"아뇨, 사랑과 웃음과 예술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인간>


<여중생 A>는 사랑과 웃음과 예술을 잃어버린 소녀의 이야기다. 소녀의 나이는 열 다섯, 혹은 열 여섯 무렵. 가만히 있어도 혼란스러운 나이에 가난과 폭력까지 짓누르니 죽을 수 밖에. 삶을 밀어낼 수 밖에. 

누구에게나 그 시절이 있다. 가난과 폭력에 시달리는 청소년 시기 말고, '내 편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는 시기 말이다. <여중생 A>가 어른들에게도 공감을 자아내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이 영화가 감수성 예민한 소녀의 성장기만을 그린 작품이 아니라는 것. 인간이란 존재의 태생적 외로움을 전부 훑어본다는 것.

영화의 엔딩에서 여중생들은 어느새 교복을 갈아 입었다. 고교에 진학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멤버가 기묘한 조합이다. 최초의 왕따 미래, 차기 왕따 백합,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다음 세대의 왕따로 지목된 안경소녀까지, 모여서 킬킬댄다. 어, 그런데 한 명 더 있다. 그 모든 왕따의 주범이었던 노란이. 노란이는 왜 여기 있나? 영화에서는 설명하지 않지만 짐작가는 데가 있다. 노란이도 결국 왕따를 당했을 거라는 것이다. 주동자가 결국 역관광을 당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손쉬운 이유는 왕따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시작되고, 순식간에 옮겨가는 것, 누구든 당할 수 있는 것.


1980년 생인 이경섭 감독이 최근에 중학교에 가봤는지는 의문이 든다. 영화에서 그리는 학교가 현실보다 너무 조용하다. 중학생들이란, 정말이지, 광기를 띠고 소란을 피우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디테일의 아쉬움은 이해할 수 있다. 더군다나 미래의 감정에 좀 더 귀기울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경의 볼륨을 낮추었다면, 치밀한 연출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감독이 이러한 감성을 잃지 않고 작품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진심으로.

5. 살아간다는 것
나도 혼란스러운 중학교 시기를 보냈다. 수업은 지루했고 동급생들은 시시했다. 뭘 어쩔 줄 몰라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그 외의 시간엔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옆자리의 친구들이 듣고 읽는 책과는 조금 다른 것들이었다.

공유되는 게 없으니 무척 외로웠다. 나는 자주 창문을 내다봤다. 그 시절의 나, 그때의 나는 누구에게도 안기지 못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안타깝게 여기는 부분이다.

그런데 <여중생A>가 두 팔을 벌린다. 오래 외로웠을 모든 존재들에게 푸근한 프리 허그를 선사한다.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너무 늦게 안아줘서 미안해요'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괜히 눈물이 난다. 그렇게 울고 나니, 지난날을 위로 받은 느낌이다. 누구에게 이 감사를 전하면 좋을까.

이제 졸렬한 평을 마치자. <여중생A>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삶이라는 드라마는 늘 심상을 남긴다. 어려운 시절 겪고 있지만 미래는 끝내 웃었다. 웃었으니까 그걸로 된 건가? 아니, 또 아프게 될 것이다. 또 울고, 또 스러질 것이다. 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그것이 삶이라는 걸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시를 한 편 적어 놓고 간다. 이 시가 <여중생A>로 말캉해진 여러분의 마음을 온화하게 쓰다듬어주리라 믿는다.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멜로디를 떠올리는 것
재채기를 하는 것
당신 손을 잡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미니스커트
그것은 플라네타리움
그것은 요한 슈트라우스
그것은 피카소

그것은 알프스
모든 아름다운 것을 만나는 것
그리고 숨겨진 악을 주의 깊게 거부하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운다는 것
웃는다는 것
화낸다는 것
자유라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멀리서 개가 짖는다는 것
지금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
지금 어딘가에서 병사가 상처 입는다는 것
지금 그네가 흔들리고 있는 것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새는 날개짓 한다는 것
바다는 일렁인다는 것
달팽이는 기어간다는 것
사람은 사랑한다는 것
당신 손의 온기
생명이라는 것

- 다니카와 슌타로, <산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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