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골수 신자였다가 게이인 형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신앙을 저버렸다는 사람의 얘기를 어디서 읽었더라.
이런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태초에 남자가 빚어지고 여자가 뒤따라 빚어진 뒤 둘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는 지극히 신화적인 이야기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좀 달랐을까. 남성우월주의나 '이성애 표준론' 같은 게 없었을까.
어렸을 적, 동성애자들의 사랑도 서로를 만지고 끌어안고 입맞추고 싶어하는 욕망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그들의 육체적 결합이 생명의 잉태라는 어떠한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그 눈물 겨운 결합행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하면서.
하지만 이성애자들의 사랑이라고해서 뭐 큰 의미를 남긴다던가. 나는 그만 이성애를 옹호할 자신이 없어졌다.
그런 생각들을 했다. 몽환적인 음악과 서정성 짙은 화면들이 황홀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고.
1983년 이탈리아 남부의 어딘가, 17세 소년 엘리오는 가족들과 여름을 만끽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그랬듯, 엘리오의 집에 식객이 하나 도착한다. 고고학자인 아버지 밑에서 공부하는 미국인 청년 올리버가 바로 그 주인공. 올리버는 여름 동안 엘리오의 집에 머물며 연구와 집필과 휴식을 전부 해낼 예정이다. 똑똑하고 잘생기고 운동 잘하는 엄친아의 등장으로 마을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몇 사람은 핸섬한 그와의 짜릿한 '서머러브'를 기대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 중 하나, 엘리오다.
햇빛과 놀 것과 먹을 것, 온통 모자람이 없는 마을. 그곳에도 없는 게 있었으니 하나는 '웃도리'요 다른 하나는 엘리오가 속내를 털어 놓을 사람이다. 길고 혹독한 겨울이 오기 전에 온몸에 햇빛을 저장해두려는 심산인지 다들 상의를 탈의한 채 생활하고 있다. 한편 낯선 청년을 향한 연정을 품은 엘리오는 말은 못하고 적기만 한다. 낙서장에, 악보에, 사랑을, 비밀을. 비밀이 되어야만 하는 자신의 사랑을.
엘리오는 과연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그 마음은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이 여름이 끝나기 전에. 이 짧은 여름과 이 짧은 청춘이 다 지나가기 전에 그는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까.
본 작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동성애 코드는 완성도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 같다. 엘리오가 소녀였거나 올리버가 '올리브'였더라도 여전히 아름다운 영화일 것이다. 다만 감춰야하는 사랑이었으므로 발랄함은 죽고 간절함이 살았다. 그 간절함은 숙연하기까지하다. 귀족과 노비의 그것보다, 근친 간의 그것보다, 원수집안 끼리의 그것보다 더 그렇다. 왜? 제일 뭇매를 많이 맞는 터부라서, 제일 서러워서.
관객이 동성애 혐오자가 아닌 이상,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치유적인 기능을 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후반부에 있다.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엘리오 아버지의 대사들이 그렇게 한다. 아버지의 덕담은 동성애자 아들뿐 아니라 모든 아픈 청춘들을 와락 끌어안는다. 십 대의 번민이 미성숙의 대가가 아니라 다시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것이라며 다독이는 아버지의 음색은 어찌 이리도 따스한가.
개체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나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다. 다른 종(種)까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종은 분명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타인의 눈물이 나를 자꾸만 울게 하는 것이 설명이 안 된다. 타인의 웃음이 그러한 것도, 타인의 체온이 절박한 것도 모두 설명이 안 된다.
연결되어 있는데 어찌 분리되어 태어났을까. 각자의 드라마를 경험할 기회를 갖기 위해선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두 사람은 강렬하게 재결합을 원한다. 가장 내밀한 부분인 혀로 서로를 핥으며, 다시 하나되길 원한다. 그래서 이름도 통일해본다. 너를 내 이름으로 불러 너를 내게 흡수시켜보기도 하고 나를 네 이름으로 부르도록해 너에게 흡수 당해보기도 하며 둘은 간신히 포개지는가 싶더니, 여름은 끝난다.
오늘 아름다운 이야기를 한 편 들었다. 헤세의 성장소설 같기도, 사강의 연애소설 같기도 한 이야기, 풀내음과 축축한 타액과 살구향기 나는 이야기를. 다시 오지 않을 시간과 계절에 대한 이야기, 비밀이 되어야 했던 사랑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