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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새벽 Dec 14. 2018

우리는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너무 늦게 태어났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9세기에 이슬람 신도들이 잠을 쫓기 위해 씹어 먹곤 했다는 커피열매는 15세기에 이르러  음료로 각광을 받았다. 당시 천주교 사제들은 이를 악마의 음료라 부르며 탄압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어디선가 집어온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책이었다. 앉은 곳은 커피숍이었다. 전세계에 2만7천개가 넘는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거대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매장에 앉아, 나는 변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나는 사제들의 눈을 피해 몰래 커피와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의 일상을 떠올려 보았다. 그이는 남들이 들을세라 조용히 커피콩을 볶으며, 자신은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늦게 태어났다며 괴로워했을까. 어쩌면, 커피 볶는 냄새가 바깥으로 새지 않도록 문틈을 죄다 수건으로 틀어막았을지도 모르지. 방 안에 가득 찬 고소한 커피향, 남들은 두려워하고 손가락질하는 그 향기에 둘러싸여, 오롯이 커피와 둘이서, 슬프고 아름답게, 그는 콩을 볶았을지도 모른다.





차별 당하는 소수자를 위해 일생을 바친 마틴 루터킹은 196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2009년에 미국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어쩌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때로 말하지 않는 쪽이 더 큰 의사표현을 하기도 하니까.

사랑에 있어 언어는 불필요한 요소다. 갓태어난 아기와 엄마가 주고 받는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언어는 불필요할뿐 아니라 종종 깊은 유대를 저해한다. 너가 그때 그렇게 말했잖아,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지난번의 연인과의 다툼이 뭣땜에 발생했는지를 떠올려 보면 이것도 금세 알 수 있다.

우리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우리는 아직도 달의 이면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심해에 대해 아는 것은 우주에 대해 아는 것보다 더 적다. 무지는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고, 두려움은 공격성을 불러온다. 무지가 오래 쌓이면 공격성은 더욱 농축돼 강력한 무기를 만들게 되기도 한다. 전류가 흐르는 진압봉 같은 것 말이다.




경쟁(competiton)은 오래된 놀이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아이들은 나뭇가지로 땅에 선을 긋고 달리기 시합을 했다. 힘도 겨뤘다. 팔씨름도 하고 쌀가마니 들어올리기도 했다. 경쟁은 국가에서 장려하는 놀이였다. 경쟁이 수준을 올리는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영단어 컴피티션의 어원은 라틴어 꼼뻬떼 (competere)에서 왔다. 원래는 '함께 노력하는,' '함께 발전하는'이란 뜻이었다. 원래는 풍요를 누리기 위한 수단이었던 돈이 풍요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된 것처럼, 꼼뻬떼는 변질해 남을 짓밟는 것이 되었다. 하나의 놀이에 불과했던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은 더 이상 인류과학의 진보를 위한 양국의 노력이 아닌, 자존심 싸움이었다. 필요하면 뭐든지 하는.

필요하면 뭐든지 하는 걸  우리는 추하다고 한다. 돈이 된다고 아이들을 납치하는 부류나 조금 편하려고 안하무인 사람 밀치고 들어오는 지하철 진상 승객들처럼. 추한 사람들이 모였는데 사랑 타령이 순조로울 리 없다. 무지와 적대심과 추한 경쟁 속에서, 가뜩이나 말없는 두 약자는 서로의 뺨을 보듬는 일 외에 할 수 없는 일이 없다.





연구에 따르면 성소수자 청소년의 자살시도율은 이성애자 청소년의 그것에 비해 3배 이상 높다. 사회가, 학급이, 가족들이 그들을 향해 총을 갈겨대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성애나 성정체성 혼란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 모른다. 모르니까 싫어하고, 총을 들이댄다. 곳곳에 피가 흐르고, 그들이 흘린 피를 또 다른 소수자들이 닦는다. 기득권이 안락한 집무실에서 <긍정적인 사고의 힘> 따위를 읽으며 오늘은 어떤 소수자를 괴롭히거나 추행할까를 긍정적으로 고민하는 동안.

관념은 인간을 구제불능으로 만든다. 견장에 별을 5개 가진 사람은 자신이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이 신과 가까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권력도, 생김새도 말이다. 

우리는 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사랑의 모양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신은 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드넓은 바다나 계곡물을 볼때 마음 한구석이 평온해지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 게다가 신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방안에도 존재한다. 현재 습도는 63%. 우리가 사랑에 빠진 눈을 '촉촉하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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