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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새벽 Dec 25. 2018

전자책으로 시집을 읽어도 괜찮을까

안현미 시집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시집을 전자책으로 읽는다. 


이 문장은 '양복 입고 농구를 한다'는 말처럼 어딘가 어색하다. 전자책이 문명의 이기인데 반해 시는 이기 바깥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자책이 미래의 상징인데 반해 시는 지나간 일을 곱씹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자책은 쾌속, 편리, 가벼움, 빠름, 동시적이라면 시는 느림, 무거움, 불편을 감수하는 것, 개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집을 전자책으로 읽고 있어도, 여전히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가지런히 밑줄을 친다(전자책에는 그런 기능도 있다). 좋은 텍스트는 접하는 방식이 중요한 게 아닌가 한다. 어떤 책들은 꼭 종이책으로맛 보겠다는 건 무의미한 다짐이었을까.


디지털 기술과 문학적 감수성은 기름과 물 같다는 관념이 무너지며, 벽 바깥에서 진을 치고 있던 많은 물음들이 밀려 들어온다. SNS와 관계욕구의 충족은 어떤가. 꼭 만나서 웃고 어깨를 두드려야 응원을 받을 수 있나. 작은 하트 버튼이 그것을 대체할 수는 없나. 문자메시지는 손편지를 대체할 수 없나. 자연사 대신 생명유지장치를 택하는 것은 꼭 무언가를 거스르는 일인 것인가.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 한편 이러한 시구가 눈에 들어 온다.


야근해,가 아니라 야해, 라고 답하고 싶지만 
나는 오늘도 야근해
ㅡ안현미, '사랑도 없이' 부분


야근은 문명이고 '야해'는 인간이다. 앞이 전자책이라면 뒤가 시다. 시인도 가슴에 시를 품은채 문명에만 머물러야 했구나.


시집 하나로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하지만 시인이 그 시집을 쓸 적에 얼마나 생각 많았을지를 떠올려보면 내 처지는 약과일 것이다. 


전자책으로 시집을 읽는 것의 단점 하나를 가까스로 찾아낸바, 글을 마치기 전에 적어둔다. 이 시집은 선물할 수가 없다. 내가 읽던 건데 참 좋아, 너도 읽어봐, 이리도 다정한 말 건네며 시집 주고 받는 멋을 전자책으로는 부릴 수가 없다. 


그래서 여러분께 시집을 드리는 대신, 나도 전자로 쓴다. 스마트폰으로, 블로그에 쓴다. 참 좋은 시집을 읽었노라고. 그것을 쓴 자는 갓난쟁이 데리고 문학 공부하러 다니다 끝내 시인이 된, 삶을 뾰족하게 갈아 거기에 시의 언어를 꿰어 낸, 문명 속 생존과업이 마모시킨 부분들을 문장으로 채워내는 자, 안현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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