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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웅 Dec 31. 2022

촌뜨기, DJ가 되다

2장 DJ 이야기

                                     

거대한 광풍이 할퀴고 지나간 듯 생애의 첫 번째 실연으로 입은 내상은 컸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이 꿈인 것만 같다가도 엄연한 현실임을 깨달으면 뼛속까지 서늘한 고통을 느꼈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오한, 그리고 식은땀이 L을 덮쳤다. 그렇게 열흘을 꼬박 앓았다. 지독한 아픔의 날이 지나갔을 때 L의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L은 그 뒤로도 한동안 방안에만 박혀 지냈다.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그 애 생각이 났다. 도대체 왜 헤어지자고 한 것인지,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마지막 말의 의미는 또 무엇인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왜 좋은 대학에 가라고 한 것인지,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왜 대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것인지 어느 것 한 가지도 알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L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DJ가 대체 무엇인지 몰랐다. L은 DJ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몸도 마음도 온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평소 L이 잘 따랐던 동네 G형을 찾아갔다. G형을 통해 그 애가 말한 DJ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하마터면 디자이너를 말하는 거냐고 되묻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다. 며칠 후, G형을 따라간 곳은 시내에 있는 분식집이었다. 그곳에 DJ가 있었다. 40년이 지났지만 L은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L은 강한 전류에라도 쏘인 것처럼 넋을 잃고 음악실과 DJ를 바라봤다. LP를 찾는 능숙한 손길, 레코드를 꺼내 천으로 닦고 턴테이블에 올려놓은 다음 고개를 옆으로 숙여 카트리지를 옮기는 모습, 음악과 음악 사이에 하는 DJ의 멘트, 그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L은 경이롭게 바라봤다. 만약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부름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 후, L의 삶은 달라졌다. 서점에서 사 온 <DJ 입문서>와 <팝 아티스트 대사전>에 몰입한 날들은 L의 인생에 있어 가장 탐구적이고 열정적인 시간이었다. L은 미친 듯이 팝 음악에 빠졌다. 고개 너머에 살던 동무네 집 전축은 L의 전유물이 되었다. 스콜피언즈(Scorpions), 딥 퍼플(Deep Purple), 레인보우(Rainbow), 도어즈(Doors), 크림(Cream)과 같은 6, 70년대 락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개학을 했지만 공부는 뒷전이었다. 학교 공부 대신 DJ와 팝뮤직에 몰두했다. 그 애를 믿는다던 자신의 말은 의미를 잃었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라던 그녀의 마지막 말도 더 이상 L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만나러 오겠다던 그 애의 말은 자신을 떼어놓기 위한 회유로 여겨졌다. L은 술과 담배 같은 무익한 어른의 습성을 흉내 내며 그 애를 향한 일종의 복수심처럼 방탕한 삶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 애가 했던 말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지만 당시의 L에게 정을 나눈 살뜰한 느낌의 그 애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평생을 같이하자던 약속을 저버린 채 떠나버린 비정한 사람일 뿐이었다. L은 방황했다. 가난 때문에 공부를 뒤로한 채 객지로 떠난 형과 누나들을 대신해서 학업에 열중하겠다는 결심은 무너졌다. 작가가 돼서 가문의 영화와 장려한 낙일을 기록한 책을 세상에 내놓겠다던 야망도 온데간데없었다. 라디오 음악 방송을 듣고 팝 음악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그나마 L을 평균치의 삶으로 데려다주었다. 날마다 김광한, 이종환, 박원웅, 황인용을 듣고 잠자는 시간까지 그들을 흉내 내는 일에 힘과 정신을 쏟았다. 팝가수의 일생부터 음악인으로의 활동, 밴드 결성부터 멤버들 간의 불화, 멤버 교체, 해체, 발표한 앨범과 히트곡, 음악에 얽힌 사연이나 뒷얘기까지 팝 음악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읽고 기억하려 애썼다. 


그해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L은 음악다방에 들락거렸다.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가발을 써야 했다. 날이 갈수록 L이 음악다방에서 보내는 시간은 점점 많아졌다. DJ가 방송을 시작하는 오후 한 시부터 고향 마을을 지나는 버스 막차 시간 직전까지 계속 다방에서 음악을 들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음악보다는 DJ의 모습과 멘트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더 신경을 쏟았다. 저녁을 거르는 것은 예사였다. 방학이 끝난 후에도 L은 야간자율학습 대신 음악다방을 선택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면 반항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하는 날이 반복됐다. 


고3이 됐지만 대학 진학은 포기한 상태였다. 가난에 허덕이는 어머니를 보며 당장 대학에 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큰형은 사업에 실패했고 작은형은 떠돌아다녔고 누다 둘은 이미 결혼을 했다. L은 자신의 대학 진학이 어머니에게 고통을 안겨줄 것이라 여겼다. 1년 넘게 학업을 게을리한 결과는 처참했다. 경제적 형편과 관계없이 그 애가 말한 신문방송학과나 L이 가고 싶었던 문예창작과를 기웃거리기조차 턱없이 부족한 성적 앞에서 L은 자포자기 심정이 됐다. 1학년 때 늘 우등생 자리를 지켰던 L을 기억하는 교사들은 그에게 화를 내거나 실망의 눈빛을 보냈다. L은 진학 대신 우선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가 끝나면 L은 야간자율학습에 열중하는 급우들을 남겨놓고 음악다방으로 향했다. 1년을 넘게 다닌 음악다방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때때로 레지(커피와 차를 나르는 여직원)들이 밥을 주기도 했다. 레지들의 구박을 덜 받기 위해 ‘물은 셀프’ 시대의 선구자가 돼야 했다. 손님이 많아 자리가 부족하면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합석을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느 날, 합석조차 어려울 만큼 손님이 꽉 들어차서 L은 쫓겨났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방 밖이 아닌 음악실로였다. 홀대의 아픔이 아닌 감격과 경이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L은 음악다방의 심부름꾼이 됐다. 방송하는 선배 DJ 대신 레코드를 찾는 일부터, 음악실 청소, 담배나 음료수를 비롯한 온갖 심부름, 심지어는 4차인지 5차인지 밤이 새도록 술 마시는 선배의 주정 종합 세트를 경험하기도 했다. 보수는 하루 450원짜리 담배 한 갑이 전부였다. 방송은 할 수 없었지만 음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심부름꾼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그해 가을이었다. 저녁 시간대에 방송하는 DJ가 시골 부모의 추수 일을 도와야 한다며 휴가를 가게 된 거였다. 그런 경우 대개는 다른 DJ에게 한 타임을 더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다방 주인은 L에게 방송하라고 했다. 다만 멘트를 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었다. L은 어떤 조건에서든 상관없이 기쁘고 벅찬 일이었다. 세 시간을 자신이 직접 선곡하거나 신청받은 곡들로 손님 찾는 전화벨이 울려도 전화를 받는 것은 레지 몫이었다. 전화를 받은 레지는 소프라노 목소리로 손님 이름을 불렀다. 명색이 DJ가 레지에게 밀리는 수모였다. 


어느 날, 판돌이의 수치에서 벗어나는 일이 벌어졌다. 레지의 소프라노 소리에 손님들의 항의가 있었고 다방 주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L에게 전화멘트까지만 승인을 했다. 그동안 집에서 수백 번은 연습했을 전화 멘트를 했을 때 다방 주인과 레지들은 환호했다. 목소리가 좋다는 둥, 천상 DJ가 체질이라는 둥 호들갑을 떨었다. 음악 멘트도 해보라는 성화에 못 이긴 척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더 요란했다. 다방 주인은 L에게 정식으로 멘트 방송을 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마침내 L은 DJ가 된 것이다. 보수도 껑충 뛰었다. 그동안 홀로 연습한 것들을 활용하며 L은 장래가 촉망되는 DJ로 선배들과 손님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DJ를 향해 키워가던 비밀스러운 야망이 가족과 지인에게 발각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가족이었다. 자신들이 서럽게 품은 배움의 한을 대신 풀어줄 것이라 믿었던 동생이 공부가 아닌 DJ로서의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안 형들과 누나들은 배신감마저 느꼈다. ‘딴따라’니 ‘반건달’이니 하는 단어를 써가며 호되게 꾸짖거나 살살 달래거나 읍소하고 애원했다. 평소 L을 살갑게 대해주던 작은형의 친구도 점잖은 충고를 아끼지 않으며 거들었다.

“디자이너는 아무나 허는 줄 아냐? 돈 있는 집안 자식들이 허는 거여.”

그는 세상 진지한데 L은 피식 웃었다. DJ를 디자이너로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 말고 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창피함을 나눠 갖는 것 같아 위안이 됐다. L은 눈치채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이고 반성하는 자세로 위장하고 웃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반대에 부딪히면 열망이 더 강해질 때가 있는 법. 가족과 지인의 반대가 심할수록 L은 DJ를 향해 더 몰입했고 야망을 더 키워갔다. 


공중파 방송국 DJ는 아니었지만 정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DJ가 됐다는 사실은 그때껏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의미였다. 고향 마을을 지나는 버스에 탔을 때 유독 그 애가 더 생각난 것은 비록 음악다방 DJ이긴 하지만 L은 그 애에게 “네가 말한 DJ가 됐”노라고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애는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등하굣길이나 좁은 지역인 까닭에 한 번은 마주칠 법도 하거니와 두 시간에 한 번 있는 버스에서 만날 확률은 더 있었는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애를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풍문에 의하면 아프다느니, 고향을 떴다느니, 외국으로 유학하러 갔다느니 하는 근거도 없고 발원지도 불분명한 얘기가 가끔 L에게 들려올 뿐이었다. L은 그 애와의 인연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그 애가 떠오르긴 했지만 L의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다. 어느 때쯤에 이르러서는 그 애에 대한 감정도 무뎌져 갔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해 겨울이 막 시작된 어느 날에 그 애가 L 앞에 나타났던 거다. 대학입학시험을 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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