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연고 Jan 19. 2024

K의 변형

[상상 오르골 -1-] 

K의 첫인상은 푸르름의 슬로모션이었다.



환한 미소에 단정한 외모, 친절한 매너를 가진 젊고 푸릇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감이 넘쳤고, 열정이 느껴졌으며 쾌활했다. 부드러운 머릿결, 투명한 피부와 빛나는 눈빛, 부유함과 청춘의 푸르름을 온 몸에서 풍기는 그를 모두들 좋아했다. 그는 당당했고, 총명해 보였으며, 부드럽지만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동기생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K는 모든 이의 신임을 얻었고 인기가 많았다. 모두들 그와 한 팀이 되어 과제를 하고 싶어 했고, 학교에서든 파티에서든 그는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게 되었다. 수업시간에 그가 하는 대답이나 발표는 모두들 절대 진리라도 되는 듯 경청했다. 그가 말할 순서가 아님에도, 모두들 제기된 문제들마다 그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다. 이런 광기와도 같은 추앙이 독이라도 되었던 걸까. K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환한 미소, 친절한 태도를 잃어가고 있었다. K의 변형이 시작된 거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앉은 자세는 거만해졌으며, 그의 미소는 삐뚤어졌다. 그는 자신의 날카로운 말로 다른 사람의 말을 끊기 시작했다. 회의를 할 때면 책상 위를 쿵-쿵-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고, 그 쿵-쿵- 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그의 동기생들은 하나둘씩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고, 총명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과 행동에서 고약한 자만과 아집, 뒤틀린 자신감만이 풍겨 나올 뿐이었다.  



그에겐 나쁜 소문도 따라붙었다. 주변의 여자들과 동시에 다양한 추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 추문들은 그에 대한 못마땅한 감정에 부어진 기름이 되어, 불씨가 붙은 거부감은 점점 더 크게 타올랐다. 더 이상 어느 누구도 그의 옆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고, 자발적으로 그와 한 팀이 되어 과제를 하고 싶어 하지 않게 되었다. 난 그래도 여전히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어느 날 그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걸 알게 됐을 때, 나도 이제는 그에게 등을 돌릴 순간이 됐음을 깨달았다. 



그 후로 나는 그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되었다. 동기생들은 그를 모두 외면했고, 그는 털 빠진 수사자와도 같은 쓸쓸한 모습으로, 졸업의 시기까지 그렇게 학교를 어슬렁거리며 지냈다. 끝날 거 같지 않던 힘든 학교 생활은 끝났고, 동기생들은 모두 원하던 일을 성취해 가며 멋지게 졸업을 했다. K의 끝은 초라했다. 그는 원하던 일을 얻지 못했고, 동기생들은 모두 그를 외면했다. 깊은 고민 끝에 나 역시 K를 내 모든 연락처 목록에서 지워냈다. 환하게 빛나던 무언가의 초라한 끝을 보는 마음은 언제나 눅눅한 슬픔과 씁쓸함을 남긴다.



변형, 외부에서 영향을 받아 일시적으로 또는 영구적으로 구조나 형태가 변하는 것. K의 변형을 불러온 건 동기생들의 무조건적 추앙이었고, 맹목적 광기를 즐기던 그들의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변형을 일으키게 한 건 본인들이면서, 그 변형을 눈앞에서 목격하자 외면하고 비웃던 것도 그들 자신이었다. 어찌 보면 K는 그들의 이기적 욕심의 희생양이었지만, 누구도 그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이유 모를 광기에 휩쓸려 변형을 겪은 K의 추락은 씁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기생들은 알 수 없는 여러 감정의 혼란을 느꼈지만, 그 누구 하나 그 감정에 대해 말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느낀 마지막 감정은 우리의 광기에 대한 자괴감이었기 때문이다.

이전 12화 연인을 돌아오게 할 칼국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