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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Nov 08. 2023

너는 앞으로 가는구나. 나는 그대로인데



열심히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지난번 카피 문구를 수정하고 있는데 사내 이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그것은 인사팀에서 보낸 이달의 승진자들 목록. 나와 상관없는 부서 사람들이 이동하고, 그만두고, 또 새로 들어온 걸 알아차리는 순간, 나보다 늦게 들어온 다른 부서의 후배가 대리가 되었다는 글을 읽었다.


"어머, 이거 봤어? 유진이 대리 달았네? 자기가 입사 먼저 하지 않았나?"

그의 눈동자에 내 표정이 어떻게 보였는지 잘 모르겠다. 환하게 웃는다고 한 것 같기는 한데 속이 많이 쓰렸으니까.


사실 승진에 대한 욕심은 크게 없었다. 지금 하고 있는 업무에 대해 온전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도 했고 대리를 단 만큼 조직에서는 더 많은 열정과 시간 할애를 압박할 것이 뻔하니 그냥 평사원인 나는 눈치 보지 않고 바로 6시에 퇴근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만족하고 있었는데, 승진 명단을 보고 다시 업무를 하는 동안 머릿속은 예상외로 복잡했다.


"나는 왜 안 됐지? 내가 뭐가 부족하지?"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지만 속은 꽤 심란했다. 나보다 훨씬 늦게, 입사일이 4년이나 차이나는 타 부서 사람도 대리를 단 것은 정말로 이해가 안 돼서 팀장에게 왜 나는 6년째 사원이냐고 따지고 싶었다.


일의 경중이 차이가 나는 걸까?

그와 그녀들이 돋보이는 창조력으로 회사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줬거나 획기적인 시스템을 개발해 조직에 이득을 줬을까?


매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어느 한 사람에게만큼은 나의 글이, 나의 안내문이 도움 될 거라 믿으며 열심히 일했는데 역시 정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헛된 일만 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맥이 확 풀렸다


"아니 당신이 왜 아직도 그냥 사원인 거야? 팀장하고 면담해 봤어?"

다른 부서 한 대리가 내게 카톡을 보내왔다.


"뭐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난 대리 싫어. 그만큼 많이 일하고 책임져야 하잖아. 으윽 난 지금이 딱 좋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를 잘도 내뱉었다. 이 정도로 속상한 거 보면 분명히 내 마음에 뭔가 삐딱한 감정이 솟은 건데 그걸 제대로 표출시킬 방법을 모르겠다. 열심히 일하지만 아무 보상이 없다. 흔한 칭찬과 격려도 말뿐이고 월급을 올려준다거나 직급을 달아주겠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먼저 상담을 신청했다가는 그럼 그만큼 책임지고 더 일할 자신이 있냐는 소리나 해댈게 뻔한 팀장의 얼굴이 떠올라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것 같다.


그리고 나선 누구도 볼 수 없는 내 책상에서 혼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부끄러워서.


나이는 삼십 대 후반에 가까워지는데 아직까지 평사원의 자리에서 머무르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해서, 그렇다고 당당하게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내 힘으로 승진할 자신이 없는 내게 화가 나서다. 내가 원하는 바를 이성적으로 어필할 수 없는 성격도 있지만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어갈 언변이 부족해 늘 지는 선택이 안전하다고 여기는 내가 너무 싫었다.


혼자서 조용히 감정적인 그러데이션 분노를 폭발하다가 누군가 쳐다보면 금세 아무 일 없는 듯 쿨하게 넘어가 버리는 내가 바보 멍청이 같아서 제일 속상했다.


일을 적게 하는 것도 아니고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닌데 왜 나만 6년째 사원인 걸까.


내가 뭐가 부족한가에 대한 물음은 결국 내가 뭘 잘못했는가에 대한 집념으로 이어졌다. 해야 할 일을 했고, 하라는 걸 해냈으며, 할 수 없는 일도 해봤는데 회사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을 알아줬다. 그리고 이 모든 건 결국 내가 더 뛰어나지 못해서, 더 잘 해내지 못해서라고 믿었다. 속상한 감정을 달래는 방법이 스스로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게 가장 편했던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하는 대신 나의 복잡 미묘한 생각과 불안을 가장 빠르게 달랠 수 있었고 곧장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다.


바보같이 나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게 마음 편한 방법이라니.



그리고 여러 갈래로 얽힌 고민과 추측을 잠재우는 방법은 어이없게도 일에 더 몰입하는 것, 들어온 메일에 빠르게 답장하며 다시 일머리와 일감정으로 스위치를 바꿔 켜는 것이었다. 멍청이는 멍청이대로 일단 놔두고 이 못난 생각마저 빠르게 피신시키는 건 바로 눈앞에 닥친 일이다. 카드뉴스 주제를 고르고, 디자인을 만들고 메인카피와 서브 카피를 적절하게 배치한 뒤 SNS에 업로드한다. 그에 달린 댓글을 체크하고 규정이 바뀐 걸 확인해서 수정할 내용을 업무 다이어리에 적으면 거북이 목은 더 심해질지언정 시간은 훌쩍 흐르고 격동했던 감정은 잠잠해진다. 분명 일 때문에 속상했지만 또 그 일이 오늘 하루 나를 살렸다. 어설프게 슬픈 감정에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일단 발을 빼고 구질구질하게 젖은 마음을 서늘한 장소인 ‘일’로 옮겨 놓았다. 조금씩 조금씩 바람이 불면 이 축축한 감정도 마르길 바라며, 다 마르고 나면 쫙 펴서 금 간 채로 곱게 접어둘 것이다.


그러니 아직은 이 금 간 마음을 펼 길 없어 눈앞에 놓인 일부터 해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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