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괜찮아 마음과 마을

그림책: “괴물들이 사는 나라”(모리스 샌닥 글/그림)



맥스가 방에서 늑대옷을 입고 장난을 치자 엄마는 맥스를 방에 가두고 저녁밥을 주지 않는다. 그러자 맥스 방은 나무와 풀이 자라고 숲이 된다. 급기야 바다를 품은 세상이 된다. 맥스는 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한다. 1년쯤 항해를 한 끝에 괴물나라에 도착한다. 무섭게 생긴 괴물들이 있었지만 맥스는 무서워하기는커녕 괴물나라 왕이 된다. 괴물들과 즐겁게 놀다가 지겨워져 집에 돌아가려고 한다. 괴물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다시 1년여 항해 끝에 집에 돌아온다. 집에서는 엄마가 준비한 따뜻한 밥과 반찬 냄새가 난다.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간단한 내용의 이야기지만 막상 그림을 보면 상상 그 이상이다. 교육적 차원으로 분석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 그림책 내용을 프로이트 심리학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 하는 논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이어져 왔다. 그런데 이런 논쟁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이한 사상이 바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다. 단순히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이성(의식)은 무의식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무의식이 인간의 본성인 셈이다. 이성(합리적 이성)을 전제해 인간 본성을 논의한 서양 2천 년 사상을 한 번에 뒤집어 버린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은 충동(Libido: 성적 에너지이자 모든 삶의 본능 에너지)이다. 현실의 자아는 무의식 속에 있는 충동이 발전된 형태다. 인간 마음을 지배하는 의식적 자아(Ego: 성격을 지배하고 통제, 조절, 실행한다)는 무의식 내의 본능적 충동욕구인 이드(Id: 쾌락원리에 지배받는 무의식)와 도덕관습ㆍ부모에 연원한 내면적 무의식적 억압인 초자아(Super ego: 도덕원리로 쾌락보다 완벽을 추구한다) 사이에서 그것들의 지시에 끌려다니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자아는 동일하고 이성에 의해 움직인다는 서양의 오랜 사상적 전통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사상에 의해 무참히 깨졌다. 나의 주인은 이제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성적 본능)인 것이다.



그림책 제목이 ‘괴물들이 사는 나라’다. 괴물은 누구일까?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어른’이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어른들이 바로 ‘괴물’인 것이다. 심리 분석에 들어가기 전 잠시 샛길로 세면, 요즘 같으면 아이가 장난을 심하게 쳤다고 아이를 방에 가두면 아동학대가 되겠지만 이 그림책은 64년 작이다. 서양에서도 그때에는 아이를 방에 가두는 것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그건 그렇고, 방에 가둬진 아이(맥스)는 상상의 나래(프로이트는 초기에 무의식은 꿈으로만 나타난다고 했는데 후기에 이르러 환상, 취중 진담, 습관적인 불안한 행동, 은연중에 나온 말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를 펼친다. 무의식인 꿈으로 치환해 보자. 즉, 맥스의 방은 리비도의 공간이고 상상(꿈)은 맥스의 이드(욕망)인 것이다. 이 욕망은 점점 커져 (꿈속) 맥스의 방은 숲이 되고 바다를 품은 세상 그 자체가 된다. 맥스는 과감히 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한다. 쾌락원리에 의해 지배받는 이드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무조건 놀고 싶은 것이다. 급기야 이 놀고 싶은 욕망이 엄마로부터 제지당하자 무의식 이드는 맥스를 엄마와 집으로부터 탈출시킨다. 무려 1년이나. 그리고 괴물나라에 도착해서 맥스를 괴물의 왕이 되게 한다. 이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엄마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제지당한 맥스의 무의식 이드는 전혀 새로운 나라로 맥스를 이끈 것이 아니라 어른의 다른 이름인 괴물의 나라로 이끈 것이다. 그러고서는 맥스를 괴물의 왕이 되게 한다. 이것은 일종의 변형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인 셈이다. 남자아이가 엄마를 차지하기 위해 아빠를 결국 죽인다는. (그림책의 특성상 죽이는 장면을 삽입할 수는 없었겠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괴물(어른)을 물리치고 괴물(어른)의 왕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일종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인 것이다. 그리고 괴물들과 실컷 장난치고 논다. 자신이 어른들의 왕이 되어 어른들을 조종하는 것이다. 그렇게 맥스는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실현한다.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무의식(여기서는 상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욕망에 기반한 이드인 무의식(상상)은 계속 지속될 수 없다. 끝내 도덕원리인 초자아에 의해 제압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림책에서는 괴물들과 노는 것이 재미없어졌다는 것으로 살짝 의미점프한다. 그러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도덕원리인 초자아가 작동하는 것이다. 엄마의 지시를 따라야 맥스는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신나는 놀이는 상상에서 그치고 현실로 돌아와 엄마의ㆍ관습의 도덕에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따뜻하고 맛있는 반찬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의 특성상 엄마의 사랑으로 끝을 맺고 있지만 프로이트의 심리학으로 보면, 현실적 자아 맥스는 철저히 초자아의 명령에 따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프로이트는 현실의 자아는 초자아의 명령에 구속당하며 살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무의식적 욕망인 이드를 너무 억압하면 자아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했다. 몸에 이유 없는(?) 아픔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우울, 정신분열, 불안 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 둘의 적절한 조절이 필요하다. 신나게 놀고 싶은 아이의 욕망과 이것을 적절히 제지하는 어른들ㆍ관습의 도덕이 서로 조화롭게 조절이 되어야 정신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한쪽만이 정답은 아니다. 아이가 무작정 물건을 부수고 노는 것을 허락하는 것만이 훌륭한 교육이 아니듯, 무조건 아이를 가두고 그 욕망을 억압하는 것 또한 좋은 교육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림책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비유한 따뜻한 밥으로 결론을 급하게 내리고 있지만, 아이의 욕망과 어른들의 훈육 사이좋은 균형점을 찾아야 인간(아이)은 심리적ㆍ정신적 아픔을 덜 겪고(또는 적절히 겪고) 훌륭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_ 작가 방정민(수업참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