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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 껍질

술, 바다, 밤기차, 도시, 끓어버린 마음과 청록빛 얼음

by 밝둡

잠에서 일어나기 전 눈의 문 앞에서 문을 열지 않은 채, 팔을 뻗어 술병을 찾았다. 오후 4시였고 술병 안에는 담뱃재로 채워져 있었다. 티비에서는 낚시하는 남자들이 오돌오돌 떨며, 지렁이를 만지고 있었다. 발을 훑으니 캔맥주가 만져지고, 빈소리를 내며 찌걱거리며 더 멀리 나에게서 더 멀리 굴러갔다. 암막커튼 사이로 빛이 두 갈래로 들어와서 바닥을 비추고 있다. 어제 읽었던 책이 엎어져 있었는데, 그 빛이 책을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은 석 달 동안 해가 지지 않는 백야상태이고, 일을 하지 않아서 이렇게 술만 마시며 지낸다. 언젠가부터 정확하지 않게 백야는 끝나지 않고, 그로 인해 술을 마시는 날은 늘어만 갔다. 나는 밤이 왔을 때 어둠 속에 갇혀 도망가지 못하는 백야의 찌꺼기를 청소하는 일을 하고 있다. 백야로 인해 생긴 수많은 그림자들은, 그림자의 몫을 하다가, 가끔 그렇게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알 수 없는 존재의 소실로 덩그러니 남는 경우도 있다. 백야는 누군가의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의 그림자도 남겼다. 길 잃은 철새가 떨어뜨리는 깃털을 남겼고, 천재소리를 듣던 아저씨의 마지막 손끝이 닿은 가위틈에도 박혀 있었다. 백야는 그렇게 물리적인 체계를 무시하고, 비논리적인 것들을 여기저기 버리기 시작했다. 내방 저 구석에도 한 조각이 남아 있다. 이름 모르는 여자의 스타킹사이에 숨어 있다. 백야가 끝나는 건 정확하지 않지만, 한낮의 구름모양으로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보통 구름은 빨간색인데, 백야가 끝날즈음에는 구름은 청록빛이 살짝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청록색옷을 입기 시작한 이유와 비슷한 맥락이다. 어둠을 기다리며, 검정을 청록색이 대신하기 시작한 이유와 비슷하다.


일어나서, 어제 온 엽서 한 장을 확인했다. 봉투에는 이쁘지 않은 글씨로 축하합니다라고 수기로 쓰여있었고, 발신은 회사에서 온 거다. 작년 운 좋게 폐허가 된 놀이공원에서 찌그러진 대관람차 안에 숨어있던 큰 놈을 수거하고 받은 선물이었다. 이 회사는 일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해주는 곳 중의 하나인데.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아는지, 밤기차 완행 티켓을 보냈다. 목적지는 바다 아래 도시였고, 예상대로 바닷물 대신 술로 가득 찬 곳이었다. 티켓을 잃어버리지 않고 내 손에 닿지 않게 벽면에 테잎으로 붙여 놓았다. 그곳에서의 일주일 여행을 고대하며,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사러 마트를 향했다.


마트를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너무도 가볍다. 나는 언젠가 수거한 늙은 마라토너의 발자국에 붙은 그림자를 몰래 가져와서 쓰고 있다. 그래서 난 지치지 않고 오래 걸을 수 있다. 불법이긴 하지만, 걸리지 않을 방법을 난 알고 있고, 둘러대기 좋을 직장을 가지고 있다. 오늘따라 하늘은 참 빨갛고, 구름도 참 빨갛다. 기분 좋은 오후다. 마트에서 난 물건들을 찾았다. 가장 필요한 건 수중에서 호흡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등에 꽂는 빨대 5개, 수중에서도 말을 할 수 있게 목젖에 착용하는 조그만 휴대용 스피커 달린 모터, 결막염 방지용 투명과일 껍질, 소화제와 수면제, 휴대용 그림자수거함통과 일회용 집게, 그리고 여행동안 비어있을 내 방에 둘 꽃들을 샀다. 집에 오는 골목에서 구름 끝에서 청록빛 조각이 반짝 빛이 났지만, 여행을 망칠 정도는 아니었기에 무시했다.


방을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가구라고는 티비 하나 있는 방이었고 3평의 방이었지만, 내가 없는 방이 외로워서 그림자로 변하는 걸 막기 위해 구석구석을 닦고, 꽃을 뿌렸다. 그리고 어느 소녀의 작은 희망에서 뜯겨나간 뜨거운 그림자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핀 담배 연기에 꽃이 기침을 하길래 집밖으로 나왔는데, 한번 자면 보름동안에 잠을 들 수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막 잠에서 깨어, 배를 채우려 담위를 우아하게 걷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그곳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곳을 가려고 그림자를 뜯어내며 69년 동안 돈을 모으고, 윤리를 지키며 살았다. 그런데 그 기적 같은 대관람차가 나를 그곳으로 보내주게 되다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곳에선 술에 스며든 호흡하나하나가 꿈으로 이어지는 환각의 파티다. 팔을 휘저으면 소용돌이치는 칵테일이 되고, 박수를 칠 때마다 1도씩 올라가는 강력한 위스키도 가능하다. 아름다운 여자의 오줌과 섞은 취한 술은, 잘못 마시면 영원히 그 맛을 잊지 못해 입맛을 잃어버린 다는 용기 있는 자만이 도전하는 술도 있다고 한다. 내 기필코 그 술을 먹어보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69년을 일했다. 그런데 대관람차가 그걸 이룰 수 있게 해 주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나의 담배 연기는 하늘 위로 조각을 내며 흩어졌다. 파도치듯 헤어졌다. 오줌처럼 퍼졌다.


다음날 난 준비한 것들을 담은 가방을 안고, 역으로 향했다. 바다아래 그 도시는 밤기차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다. 밤기차가 출발하는 곳은 매일 바뀌는데, 오늘의 밤은 지금 떠 있는 구름이 서해 바다 쪽이라고 알려주었다. 서둘러서 그곳을 향했고, 난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벽에서 떼어내었던 티켓을 들고 파도치는 바다 앞에 섰다. 내 옆에 큰 바위뒤에는 불륜으로 보이는 늙은 여자와 젊은이가 팔짱을 끼고 있었고, 그 뒤에는 강아지를 안은 400살가량으로 보이는 학생으로 보이는 아주머님이 있었다. 밤기차는 부엉이우는 소리를 내는 파도가 입구였다. 파도소리에 섞여 부엉이 소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윽고 부엉이 소리를 내는 파도가 나타났다. 그쪽으로 우리 네 명은 향했다. 부엉이 소리가 서른 번 정도 울리고 나면 문이 열린다고 티켓에 쓰여 있다. 부엉이 소리가 나며 파도가 한 번씩 칠 때마다, 내 가슴도 철썩철썩 요동쳤다. 숨 쉬듯 마시는 술과, 모두 꿈처럼 취해, 스스로도 자기 웃음소리에 놀란다는 그런 미소를 짓게 된다는 술로 채워진 도시. 그 도시로.

부엉이 울음소리가 서른 번을 향할 때마다, 내 등에 꽂혀 있는 빨대에서 보글보글 소리가 났다. 부엉이 소리는 파도소리 위에 얹힌 온음표처럼 멋있게 나를 초대하고 있었다. 곧 마지막 파도가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후드득 떨어졌고, 흔들리는 바다 위로 밤기차가 다가왔다. 우리 넷은 서로 마주치지 않는 창가를 선택했다. 기차는 한 칸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갯벌에서 게를 잡는 사람들의 땀에서 채취한 그림자의 힘으로 움직였다. 밤기차는 바다 위를 흘러갔다. 커다란 분홍색 고래가 흘러가는 밤기차를 호위해 주었고, 정말 어두운 밤이면 너무나도 아름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밤기차가 바다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할 무렵, 직원 한 명이 티켓을 확인하러 잠시 얼굴을 내밀었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한참을 간 후 다시 티켓을 확인했다. 나는 등에 꽂힌 빨대로 숨 쉬는 것을 금세 적응 하기 시작했고, 말을 할 때마다 모터가 지글거리며, 스피커에서 나오는 내 기이한 콧노래소리도 재밌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시간가량을 밤기차는 도시를 향했다.


밤기차는 물을 가르고 질주하다가, 드디어 술로 이루어진 도시를 알리듯, 어느 순간 술 취한 듯 나아가기 시작했다. 기차는 가끔 딸꾹질도 했고, 등에서 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돈을 아끼려고 투명한 과일껍질로 그 광경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참 아쉬웠다. 도시는 알코올만큼 투명해서, 아주 멀리 있는 사람의 콧구멍도 보일 정도였다. 도시는 생각보다 작았다. 아마 내 방을 만개 정도 이어 만들었을 법한 크기였다. 그곳이 그렇게 된 건 아주 오래전 코끼리를 사랑한 고래의 눈물로 바닷속 깊은 곳에 사는 해파리들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밤기차는 우리가 내리자 동쪽 어느 곳에 있을 부엉이 소리를 찾아 떠났다.


도시는 모든 것들이 이상했지만 정상처럼 흘러갔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용해 본 적 없는 안면근육을 사용하여 웃고 있었다. 저렇게 웃는 게 가능했구나. 도시의 술은 피를 타고 돌며, 각자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백야아래에 바닷속에 내 몸속에 피를 타며 술 한 방울 한 방울은 그림자를 남겼고, 그림자는 온몸을 빨아드리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머릿속은 재미 삼아 만들어본 50번 박수를 쳐 만든 위스키가 들어가자, 백명의 여인들이 뇌에 키스하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오. 이거 끝내주는걸, 9번 박수를 치니 어릴 적 꿈이었던 비행조종사가 되어있었다. 서른 번 박수를 치면 파도를 맞는 도사가 되었고, 다시 서른 번을 쳐보았지만 도사는 되지 않고, 그 대신 꽃밭에 누운 아이가 되어있다. 취기는 온몸을 덮고, 도시를 자연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바닷속에서 태어난 물고기였고, 그들의 빨대는 아가미였다. 뭉그렁거리고 볼록 거리는 그들의 말은 고대어였고, 계속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난 내 방에 뿌려놓은 꽃도 다음엔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한다. 취한 꽃들이 지나간 연인들의 추억을 담아 내게 향기로 인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끔 경찰들이 있었는데, 이 행복한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을지 궁금했지만, 미치도록 완벽한 행복뒤에 찾아오는 정사각형의 허무로 인해 빨대를 뽑는 사고를 위한 조치였다. 난 다음날 내 평생소원의 술 한잔을 앞두고 잠을 청했다. 거대한 조개로 이루어진 곳에서 잠을 잤는데

조갯살이 온몸을 핥아대는 꿈같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수면제는 필요 없었다. 조갯살을 한번 꼬집으면 열리고, 또 한 번은 열리는 그런 곳이었다.


이윽고, 꿈의 시작이었던 아름다운 여인의 오줌이 섞인 술을 마실 순간이 다가왔다. 그곳은 싸구려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는데, 나는 줄을 서서 기다렸다. 내 앞에 밤기차를 타려 기다리며 보았던 , 늙은 여자와 젊은 남자가 보글거리며 행복한 얼굴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은 같이 들어갔고, 잠시 후 늙은 여자가 뛰쳐나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그 고급 모터가 달린 고급스피커도 그 소리를 제대로 못 내어주었다. 늙은 여자는 웃고 있었지만, 이상한 괴성을 지르고 있었고. 그 입술은 청록색을 띠고 있었다. 블라인드가 살짝 제쳐진 사이로 젊은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 앞에 기다란 목의 찐한 검정색 머리를 한 여인은 무릎 꿇은 젊은 남자의 어깨에 한 다리를 걸치고 벌리고 서서, 입에 대고 오줌을 싸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는 청록빛 입술의 늙은 여자가 계속 소리를 지르다가 어느새 사라졌다. 한참 후 젊은 남자는 세상 모든 것을 경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참는 웃음이 가능해진 그는 피식피식 웃을 때마다 빨대에서 보글보글 하고 방울이 퍼져 나갔다.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고 지나간 그의 비장함이 섞인 행복을 가늠하며, 난 블라인드 안으로 가서, 틈으로 보았던 그 순간이 얼른 오길 기다리듯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올리니, 그 여인의 입에서 포근한 이불 같은 모터음섞인 목소리가 들렸고, 한쪽 발이 내 왼쪽어깨에 걸쳐졌다. 나는 고개를 더 올렸다. 쫙쫙 빨아드리기 위한 나의 69년의 세월이 지금의 내 입술에 온 기를 모아, 순간이 아닌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혀를 앞장 세웠다.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 올려보니 귀엽게 겹쳐진 턱살이 보였다. 옆으로 울려 퍼지는 가슴과, 내게 닥쳐올 한 줄기를 기다리며, 떨고 있는데, 그녀의 머리츰 머리카락 사이로 수상함을 느낀다.


아! 너무 끓어버렸다. 100도를 넘어버린 나의 흥분이여, 이럴 때 얼음같이 찾아온 그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머리카락사이로 바다를 통한. 수키로 위로 뻗어진 수면을 뚫고, 내 투명한 과일껍질을 통해 보이는 저기 저 멀리 보이는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었다.


그 구름은 찐한 악마처럼 웃으며 내게 청록빛을 뽐내고 있었다. 하늘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어둠의 손길이 하늘을 휘젓기 시작했다.

조급해지기 시작했고, 큰 결심을 했다.

뽑고 먹자.


난 등의 빨대를 뽑아버린다.

모터 달린 스피커도 떼어낸다.

입술을 활짝 벌리고 쭈억하고 가져다 댄 후 모든 걸 삼키기 시작했다. 여자의 내려다본 웃는 얼굴이 바로 겹쳐 보인다. 그 안에서 난 호흡을 하고 신비를 맛본다.

목구멍을 타고 사랑한 여자가 흘러 들어왔다.

눈물이 흐르고, 가쁜 숨이 뒤섞인 것을 더 빨아재꼈다.

웅성웅성 소리에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저 멀리서 경찰이 다가오는 게 보인다.

나는 죽어가고 있고, 콧물을 흘리며, 날 좀 내버려두라는 손짓을 했다.


투명 과일껍질 위로 어둠이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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