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연의 Feb 26. 2022

계약

온기가 필요해


"해냈어!"

우리집 네 살 꼬마가 기저귀에 담긴 응가를 변기에 버리면서 외친다. 응가를 해냈다는 건지, 안 떨어뜨리고 변기에 잘 버렸다는 건지. 어쨌든 아이는 그렇게 기뻐한다. 자아가 쉼없이 팽창중이라 뭐든지 자기가 한다고 우겨서 피곤하지만, 그 작은 삶에 '해냈어!'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 진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받아주는 수 밖에.


해냈다는 말, 내가 해냈다는 그 말은, 무엇인가를 해 낸 자기 자신에 대한 짧고 강력한 칭찬이다. 뿌듯함과 자랑스러움, 설렘이다. 그 동안 애쓴 데 대한 보람과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충만함이 밀려온다. 오래가지는 않는다. '해냈어!'라고 외치는 찰나의 순간, 뜨거운 행복감이 순식간에 온 몸을 휘감고 지나가지만, 그 열기는 생각보다 금방 사그라든다. 그래도 괜찮다. 한껏 충전한 성취감과 자신감이 에너지가 되어 그 다음 삶의 스텝을 밟으면 된다. 계속 계속 뜨겁게 타오르면 그게 더 위험한 일 아닌가.


아이 응가에 비할 바는 아니다만,

어쨌거나 해냈다. 이제 겨우 계약 단계이긴 하지만, 진짜 작가가 되었다.


22년 다이어리에 '팀장, 코치, 작가, 학부형, 퍼실리테이터'라고 내 다섯 개의 이름을 적었었는데, 그 중 가장 흐릿했던 세 번째 이름이 비로소 또렷해진 느낌이다. 물론, 출판사와 계약을 했다고 작가는 아니다. 책이 나와야 작가다. 그 전에 글을 써야 작가다. 그것도 매일, 업으로서 최선을 다해, 손과 머리에 쥐가 나도록. 그렇게 할 것이다. 할 수 있다. 첫 시작을 해냈으니까.


출판사의 문자 하나에도 가슴이 뛰는 초보 작가다. 계약하자는 말, 내 글이 마음에 든다는 말, 앞으로 잘 해보자는 말, 눈물이 날 만큼 벅찬 생애 첫 순간의 말들을 가슴에 꾹꾹 눌러 새겨본다. 이제부터 필요한 건 신나게 타오르는 기쁨의 열기가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묵묵히 글을 써나갈 온기다. 그것이 작가의 삶이리라.


오늘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기록이기에 남겨본다.

작가의 이전글 방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