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경, 나는 관계가 어려운 사람입니다
바야흐로 ‘무인 (無人)’의 시대가 도래했다. 카페에서는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고, 식당에서는 로봇이 서빙을 한다. 클릭 몇 번이면 집에서 배달 음식부터 생활 용품까지 받을 수 있고, 배달 기사님들과 마주치지 않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화상 통화를 이용한 수업이나 재택근무가 보편화되고 집에서 다양한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된 지금,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와 관계는 분명 예전 같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들과 최소한의 관계라도 유지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에서 에너지를 얻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해지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걸 즐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어렵다. 관계를 수립하고 유지해나가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여러 종류의 환멸 때문이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과 관계가 틀어지거나 관계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들, 내가 그들에게 줄지도 모르는 악영향 등의 문제는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대인관계에 몸서리치게 만든다.
그러니까, 관계는 누구에게나 어렵다는 말이다. 얼마나 많은 관계를 유지하고 또 얼마나 깊은 관계를 유지하든지는 상관없다. 어떤 관계든 어렵기 마련이다. 김민경 작가의 ‘나는 관계가 어려운 사람입니다’는 그러한 사람들을 위한 교과서 같은 책이다. 실제로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나를 지칭하는 말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책장을 넘기던 무거운 마음은 작가의 진심 어린 조언 한 줄 한 줄에 유연해졌다.
김민경 작가는 앞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사람을 대할 때 있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요소들을 알기 쉽게 가르쳐준다.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수련을 받았다는 저자는 융 학파의 꿈 분석을 공부하고 최면치료 고급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또한, 정신건강의학 전문의로 일하면서 내담자들과의 상담을 통해 그들이 사람으로부터, 관계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면서 왜 같은 인간으로부터 상처를 받을까. 저자도 같은 의문을 가지고, 대인관계로부터 기인한 어려움을 마주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나는 관계가 어려운 사람입니다’는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에서는 관계에 영향을 받은 개인의 마음을 다루고 있다. 타인의 인정과 시선을 의식하거나 공감하기 힘든 상황, 분노가 끓어오르는 걸 참기 힘든 상황 등을 다루며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2장에서는 그 관계의 영향에 대해서 보다 깊게 다루고 있다. 타인과 나의 경계를 정하고, 감정을 분리할 수 있도록 가르쳐준다. 또한, 가스라이팅에 대해 자각하고 그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알려준다. 스스로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킬 수 있도록 말이다.
3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관계를 회복하고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단계이다. 마음의 경계선을 허무는 방법부터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알려주며 유연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4장은 스스로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도와준다. 무기력한 마음을 달래고, 다시 온전하고 건강한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알려주는 과정이다. 긍정적이고 활기찬 변화를 위해서 꼭 거쳐야 할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장마다 소주제가 나누어져 있고, 소주제마다 5장 이내의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우선 읽기에 편했다. 분량의 영향이 아니었다. 저자 김민경이 독자들에게 간결한 말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간결한 문장 덕에 부담 없이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고, 그렇게 받아들인 메시지에는 언제나 납득할만한 과학적, 의학적 근거가 함께 있었다. 우선 부드러운 공감의 말하기로 독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후, 타당한 근거로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그 근거들은 의학적 지식이 부족한 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풀어서 설명되어 있어서 전혀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저자의 말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앞서 말하듯이 나는 사람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다. 학생 때는 언제나 교우관계가 원만했고 학교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랬던 내가 시간이 점차 흐를수록 좁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내 관계가 전부 넓고 얕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넓은 망망대해에는 내가 발을 붙이고 설 수 있는 섬이 몇 개 없었다. 정말 얕아서 발을 디딜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자꾸만 그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관계의 홍수에서 나는 스트레스와 중압감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럴 바엔 몇 안 되는 내 작은 섬들을 소중히 가꾸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왜 그 넓은 대인관계에서 상처를 받아왔는지, 진솔한 관계들만 남았다고 생각했던 현재까지도 마음이 힘든 상황이 많은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내게 솔직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저자가 전하는 말 한 마디에 고개만 끄덕일 수 있었다.
나는 공감을 잘한다. 그렇다고 길 위에 놓인 돌멩이 하나하나에 이입할 정도는 아니지만, 오늘 읽은 책 한 권에, 영화 한 편에, 노래 한 곡에 쉽게 이입하고는 한다. 그런 성격은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누구이고 어떤 이야기를 하든 간에 나는 맞장구를 쳐주며 공감해줄 자신이 있다. 이건 상대에게는 좋을 수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는 피곤한 성격이긴 하다.
저자는 공감과 분노에도 적절한 경계가 있다고 말한다. 무조건 상대에게 모든 걸 공감할 필요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과하게 분노할 필요도 없다고 말이다. 또한 타인에게 모든 걸 말해줄 필요가 없다고도 한다. 공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타인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건 아닌지 간혹 후회하고는 한다. 낯선 분위기가 싫어서 나를 향한 질문에 전부 답을 해주다보니 생기는 후회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니. 뭔가 후련하면서도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감정을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 내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타인과 나의 경계를 그을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쉽게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저자의 문장은 내게 변하고자 하는 의지를 안겨주었다.
대인관계 스트레스는 가까운 사이에서도 생기곤 한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말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 아닐까 싶다. 어렵게 받아들인다 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나도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잔류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본다. 나 역시 그렇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겐 나도 그렇길 바란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향은 회피였다.
내 지인들은 모두 알 것이다.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웬만해서는 좋은 게 좋은 거다, 라는 생각으로 넘기려고 한다.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은 것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그냥 넘긴다고 넘겨지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감정은 어떤 형태로든 그 크기와 모양을 알려온다. 가볍게 치부하고 싶었던 감정의 조각은 어느새 내 안에 침잠되어 무겁게 마음을 내리누른다. 그리고 그 무거운 잔해들은 내가 약해졌을 때를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가 내 몸과 마음을 지배해버린다. 회피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저 감정의 폭발의 정도를 키우고, 그 시기를 늦추는 것뿐이다. 우리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최근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가스라이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스라이팅은 가까운 관계에서도 많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단호하게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까운 관계라서, 악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각자 이유는 다르겠지만 쉽게 관계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회피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 우리는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스스로를 사랑해야 하며, 더불어 스스로에게는 사랑받아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게 중요하다. 무작정 감정을 회피하는 건 나에게도, 관계에게도 독이다.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하고, 그로 인해 관계를 유연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나는 나를 위해 살아간다. 왜냐면 그게 ‘나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한 번 뿐인 인생은 남을 위해 사는 게 아니다. 남이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남의 인생을 살아줄 것도 아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남을 과도하게 생각해줄 필요도 없다.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를 포장하거나 꾸미는 삶은 온전한 만족을 줄 수 없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건강한 삶을 살고 싶다면 우선 우리는 나로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건강과도 직결된다. 스트레스를 받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늘어나고, 소화 불량이 이어지며, 신경이 예민해진다면 우리는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한계를 파악해야 한다. 그를 기준으로 감정을 분리하고 타인과의 거리를 조정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나’를 우선으로 두어야 한다.
안다. 내 감정과 마음을 추스르는 건 정말 어렵고, 거기에 타인관의 관계가 얽혀 있다면 이는 배로 어려워진다. 어떻게 바꿔야할지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도 막막할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관계가 어려운 사람입니다’를 읽어보자. 온전한 나의 시간에 한 장 한 장 읽다보면 어느새 상처 받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걸 위해 노력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이다. 하지만 이 책과 함께라면 그 방향과 방법이 더 이상 막연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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