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현재, 우리의 삶은 사진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핸드폰의 대부분에는 기본적으로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고, 전문적인 기술이 없어도 단 한 번의 터치만으로 눈앞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그리고 많이 사진을 찍는다.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또, 어제 하루 동안 몇 장의 사진을 찍었는지 떠올려보자. 필자의 경우는 십분 전에 찍은 동네 카페의 아메리카노 사진이 가장 최근의 것이다. 필자는 되도록이면 하루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하는데, 필자가 사진을 찍는 목적이 바로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구름이나 달이 예쁘면 하늘 사진을 찍고, 어떤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는지 사진을 찍는다. 맛있는 음료를 먹거나, 재밌는 영화를 본 날에도 사진이 빠질 수 없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찍은 사진도 하루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이렇게 모인 사진 한 장 한 장이 전부 내 하루의 조각이다. 그 조각들을 더듬으며 필자는 오래전 어느 날의 기억을 반추할 수 있다. 귀찮아서 미뤄버린 일기를 쓸 때 어떤 하루를 회상하기에도 요긴하다.
사진을 찍는 목적은 다양하다. 어떤 이는 필자처럼 기록을 위해 사진을 찍는다. 어떤 이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또 어떤 이는 소중한 추억 혹은 무언가를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도 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멋진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진을 찍는 것도 쉬워졌지만, 이를 공유하는 것은 더욱 쉬워진 세상이다. 우리는 몇 번의 클릭만으로 SNS와 메신저 SNS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사진을 공개하거나, 지인들에게 사진을 전송할 수 있다. 필자 역시 메신저로 사진을 전송하거나, SNS를 통해 사진을 게시한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사진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만든다. 좋은 곳에서 좋은 음식을 먹는 나. 재밌는 문화생활을 한 나.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에서 즐거운 휴가를 보내는 나. 그렇기에 어떤 사람들은 SNS에 올리기 위한 사진 한 장을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기도 한다.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든, SNS를 통해 삶을 기록하기 위해서든 다양한 이유로 우리는 사진을 찍고 그것을 공유한다. 사진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말을 서로에게 건네기도 한다.
“어디 올리지도 않을 거면서 왜 그렇게 사진을 찍어?”
그런데 여기, 평생 사진을 찍어왔으면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사진작가가 있다. 죽는 순간까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수십만 장의 사진은 그의 수수께끼 같은 삶의 일부분을 대변해준다. 오직 카메라를 통해 이야기했던 어느 포토그래퍼의 비밀스러운 삶이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를 통해 공개된다.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는 비밀스러운 사진작가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담은 사진집이자 그녀의 삶을 되짚고 작품을 분석한 비평 에세이이다. 이 책은 그녀가 찍었던 수많은 사진 중 가장 깊이 있는 작품 235점을 담고 있으며, 마이어의 독창적인 시선을 분석하여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비비안 마이어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아이 돌보미와 가정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거리로 나가 수십만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사진을 공개하지 않은 채 생을 마감했다. 가까이 지냈던 지인들은 있지만 그들이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기에 마이어의 삶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주변 사람들은 늘 헐렁한 남자 셔츠, 구식 블라우스 등의 옷차림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비비안 마이어를 가식 없고 지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독특한 억양과 무뚝뚝한 성격은 그녀를 가까이하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신문과 책, 사진 필름이 가득한 박스에 자신의 인생을 담고, 언제나 목에 사진기를 걸고 있던 마이어는 분명 비범한 사람이었다.
말년의 비비안 마이어는 거의 노숙자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이라고 표현했던 박스들을 보관하던 창고는 임대료를 내지 못해 경매에 부쳐졌다고 한다. 그 안에는 15만 장의 사진 필름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녀가 생전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사진들이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들은 마이어가 죽은 후, 역사가 존 말루프에 의해 세상에 공개된다. 비비안 마이어가 찍은 사진들의 가치를 알아본 존 말루프는 페이스북에 사진들을 올렸고,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저명한 잡지에 그녀의 사진이 소개되었고, 전 세계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그녀의 삶이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다. 영화 ‘캐롤’의 감독 토드 헤인즈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비비안 마이어가 ‘캐롤’에 영감을 주었다고 밝혔다.
마빈 하이퍼만은 이 책을 통해 그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비록 퍼즐 맞추듯 작은 조각들을 이어붙이는 것이 전부이지만 이렇게라도 비비안 마이어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으니 실로 다행이다.
그의 삶은 오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정착되지 않고 넉넉하지 않은 삶을 살았으며 말년에는 어려운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동정심도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불쌍하지 않으니까. 그녀의 신념과 가치관은 꼿꼿하게 그녀를 지탱했을 테니까. 이 책을 읽는 내내 그것을 느낄 수 있어서 오묘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비비안 마이어는 지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정세와 문화에도 밝은 문명화된 사람이었다. 그가 박스 가득 모으던 신문과 논문, 책, 잡지를 비롯한 다양한 수집품이 그걸 뒷받침한다. 그녀는 여러 번 거주지를 옮기면서도 그 박스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물건들은 또 다른 비비안 마이어였다. 그가 아이 돌보미로 일하며 키웠던 겐스버그 형제는 그녀를 자유롭고 강인하며, 다정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키우며 인생에 대해 남다른 철학을 보였던 비비안 마이어의 삶은 정말 흥미롭다. 우리는 그녀의 삶 중 극히 일부만을 알 수 있으며, 심연의 이야기는 평생 알 수 없으리라는 것마저 비비안 마이어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말 그대로 감각적이다. 그녀가 자주 사용하던 롤라이플렉스가 만들어낸 6cm의 정사각형 흑백 사진들은 그녀가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는지 보여준다. 마이어는 정사각형이라는 형식을 유지하면서, 정사각형이 가지고 있는 정적인 이미지는 마이어 특유의 구도와 감성으로 해결했다. 그 이후 작업한 다양한 크기의 사진과 컬러 사진에서도 마이어가 피사체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는지가 담겨있다.
마빈 하이퍼만은 마이어의 사진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면서 그 가치를 쉽게 풀이해준다. 이를테면 마이어는 관심이 있는 피사체를 단 한 장만 찍었다는 사실을 통해 그녀의 자신감과 재능을 포착한다. 마이어가 살았던 시대의 상황을 고려하여 그녀의 시각을 추측하기도 하고, 그녀가 뷰파인더에 담았던 대상을 통해 그녀의 의도를 추측하기도 한다.
우리가 비비안 마이어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마빈 하이퍼만의 에세이는 사진을 보다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는 배경지식이 된다. 또한, 마이어의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보다 가까운 곳에서 비비안 마이어를 만날 수 있도록 해준다.
비비안 마이어는 단순한 천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노력하는 천재였다. 마이어는 다양한 카메라를 만져보고, 수많은 사진을 거쳐 발전하는 포토그래퍼였다. 그 성장의 과정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고,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를 통해 그 중 235점의 사진을 고화질로 감상할 수 있다.
그녀가 세상에 남긴 선명한 족적을 훑어 내려가다 보면 그녀가 얼마나 독창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 느낄 수 있다. 우선, 피사체의 다양성이 있다. 바닥에 놓인 신문 뭉치나 차고에 놓인 자동차, 손을 맞잡은 연인의 모습, 카메라를 보고 웃는 아이들 등 거리의 모든 것이 그녀의 사진에 담겼다.
때로는 그녀 스스로를 찍기도 했다. 거리의 거울과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담기도 하고, 직접 카메라 앞에 서기도 했다. 인상 깊었던 사진은 여러 개의 거울이 진열된 곳에서 자신을 찍은 사진이었다. 거울에 다양한 각도의 마이어가 담겨 있어 한 장의 사진에서도 여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흥미로운 사진이었다. 다양한 구도의 자화상은 마이어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담고 있다. 단단하게 느껴지는 눈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오래 오래 사진을 감상하게 된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는 사진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녀가 과연 그들을 촬영할 때 허락을 구했을까? 아니었던 것 같다. 초상권에 대한 인식이 높은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점이 비비안 마이어의 시각을 공고히 한다고 본다. 그녀가 뷰파인더에 담았던 사람들은 전부 그녀가 바라본 세상 그 자체였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진에 담았고, 그것은 말 그대로 그녀가 보고 느낀 전부였을 것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고용된 모델들이 아니니 그 사람들과 사진 구도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힘들었을 테다. 그러므로 마이어의 작품들은 전부 그녀가 연출한 작품이거나, 상황 그대로의 장면을 포착한 작품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사진은 마이어가 보고 느꼈을 모든 것들을 가감 없이 담고 있다.
이처럼 비비안 마이어는 사진을 통해 말을 했다. 인간에 대한 본능적인 호기심과 세상에 대한 비평, 독특한 유머 감각 등 비비안 마이어의 생각들은 찍는다는 행위 자체를 통해 표출됐다. 그러한 사진들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이어가 문자 그대로 ‘찍는 행위’를 중요시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순수한 사진을 향한 열정이 사진 자체로 남아있는 것이다.
마이어의 사진이 세상에 공개된 과정도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생전에 단 한 장의 사진도 공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매로 넘어간 사진 필름이 그녀 사후에 현상되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 진가가 입증됐다.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사진들이 이제는 전 세계에서 전시되고 있다.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유도, 사진에 담긴 의도도, 사용된 기법도 전혀 모른 채로 그녀의 사진만이 남았다. 사진을 찍은 이의 삶은 극히 일부분만 밝혀진 채로.
과연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쏟아진 세상의 관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마이어는 살아있는 동안 누가 자신의 작품을 볼 것인지에 대해 단호하게 결정한 바 있다. 사진을 현상하여 공개하거나 팔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그 부분에 대한 의사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추측뿐이지만, 마이어는 이 관심에 무심할 것 같다. 기뻐하거나, 언짢아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전시를 바라볼 것 같다.
만일 존 말루프가 이 사진을 그냥 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페이스북에 게시하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비비안 마이어에 대해 알지 못하게 됐으면 어땠을까. 평생 사진을 찍어왔으면서 그 사진으로 관심을 끌고 싶지는 않았던 마이어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사진에 대한 마이어의 열정과 노력이 세상에 드러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비비안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는 책의 초반에서 사진을 감상하는 데 기반이 되는 이야기를 전부 전해주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의 사진을 보고 싶도록 만든다. 마이어의 사진에 대한 설명과 다양한 정보들은 그녀의 흑백 사진에 내려앉아 특별함을 더한다. 단순히 사진만 모아둔 것이 아니라 사진에 얽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묶어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삶 전체가 미스테리 영화 같은 비비안 마이어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게 한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누군가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각인시키겠다는 의도가 보이지는 않는다. 대신, 자연스러운 모습을 통해서 사진과 내 삶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왠지 내 주변에 있을 것만 같은 사진 속 피사체들은 사진을 보는 내내 기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내가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기에 담긴다면 어떤 모습으로 포착될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신비로운 비비안 마이어의 삶과 사진이 담긴 이 책은 상당히 크고 무겁다. 그 묵직함은 비비안 마이어의 방대한 삶 중 일부에 불과하다. 평생 알 수 없을 그녀의 인생을 떠올리면 사진 한 장 한 장 곱씹게 된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성수의 그라운드시소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비비안 마이어가 직접 인화한 빈티지 작품과 미공개작을 포함한 270여점의 사진과 그녀가 사용했던 카메라 및 소품, 영상, 오디오 자료 등이 포함된 전시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은 11월 13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와 영화, 전시회로 만나볼 수 있는 비비안 마이어와 그녀의 작품들을 사진집으로 소장해 언제나 펼쳐볼 수 있는 건 큰 선물이다. 가끔 이 책을 펼쳐 카메라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 천재 포토그래퍼를 만나고 싶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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