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인류의 통합/ 10. 돈의 향기(275~278쪽)
"일명 벽돌책으로 불리는『사피엔스』, 구입한 지 2년 됐으나 쉽게 손에 안 잡혀 숙제로 남아있었다. 올해도 안 읽을 게 뻔하다. 읽어낼 무기가 필요하다. 찾은 것이 '통필사', 손필사가 필사의 정석이다만 자신 없다. 안나카레니나 통필사를 손글씨로 한 적 있는데 쉽지 않았다. 기간에 대한 약속은 없다. 하루 한 페이지든 두 페이지든 써 '완독'을 대신할 거다. -2025.01.10.-
9. 역사의 화살
10. 돈의 향기
11. 제국의 비전
12. 종교의 법칙
13. 성공의 비결
[필사와 단상]
10. 돈의 향기
로마 주화에 대한 신뢰는 매우 강력해서 국경 바깥에서조차 사람들은 데나리우스 주화를 받았다. 기원후 1세기 로마 주화는 인도 시장에서 교환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가장 가까운 로마땅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인도사람들은 데나리우스와 거기 새겨진 황제의 얼굴을 너무나 신뢰하여, 현직 지배자들은 자신의 주화를 만들 때 데나리우스를 흡사하게 모방했다. 로마 황제의 얼굴 초상까지 말이다! '데나리우스'라는 이름은 주화를 포괄적으로 부르는 말이 되었다. 무슬림 칼리프들은 그 이름을 아랍어화 해서 '디나르'를 발행했다. 디나르는 오늘날에도 요르단, 이라크,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튀니지를 비롯한 여러 나라 화폐의 공식 명칭이다.
리디아 스타일의 주화 제조법이 지중해에서 인도양까지 펴져나가고 있을 때, 중국은 이와 조금 다른 화폐 시스템을 개발했다. 청동 동전과 표식이 없는 은괴와 금괴를 기반으로 한 시스템이었다. 그렇지만 두 시스템은 공통점이 아주 많아서(특히 금과 은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중국과 리디아 사이에는 금전적, 상업적 관계가 밀접하게 구축되었다. 무슬림 상인과 유럽 상인 그리고 정복자들은 리디아 시스템과 금이라는 복음을 지구와 매우 구석진 곳에까지 퍼뜨렸다. 근대 말에 이르자 전 세계가 단일 화폐권역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금과 은을 기반으로, 나중에는 영국 파운드나 미국 달러처럼 신뢰받는 소수의 통화를 기반으로 하게 되었다.
국경과 문화를 초월하는 단일 화폐권역의 등장은 아프로아시아의 통일을 위한 기초, 결국에는 지구 전체를 단일 경제정치권역으로 통합하는 기초를 놓았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했고, 각기 다른 통치자의 지배를 받았고, 각기 다른 신을 숭배했지만, 모두 금과 은, 금화와 은화를 신뢰했다. 이런 공통의 신념이 없었다면, 세계 무역망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16세기 미 대륙에서 침략자들이 발견한 금과 은 덕분에 유럽 상인들은 동아시아에서 비단, 도자기, 향신료를 살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경제성장의 바퀴를 돌릴 수 있었다. 멕시코와 안데스 산맥에서 채굴한 금과 은의 대부분은 유럽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제조업자의 지갑 속에 자리 잡았다. 만일 중국인들이 코르테스와 그 일당이 앓았다는 '마음병'에 똑같이 걸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금이나 은으로 하는 결제를 거부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중국인, 인도인, 무슬림, 스페인인의 문화는 서로 크게 다르며 의견을 같이하는 부분이 적은데도 다들 금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스페인 사람들은 금을 믿고 무슬림들은 보리를, 인도사람들은 별보배고등을, 중국 사람들은 비단을 믿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학자들에게는 대답이 미리 준비되어 있다. 두 지역이 일단 무역으로 연결되면, 운송가능한 물품의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합에 의해 평준화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런지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가상의 상황을 떠올려보자. 인도와 지중해 지역 사이에 정기적인 무역이 시작되었을 때, 인도 사람은 금에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거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하자. 하지만 지중해에서는 금이 선망하는 신분의 상징이어서 가치가 높았다.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인도와 지중애 사이를 여행하는 상인은 금의 가치 차이에 주목했을 것이다. 인도에서 금을 싸게 사서 지중해에서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남겼을 것이다. 그 결과 인도에서 금의 수요와 그 가치는 급상승하게 된다. 동시에 지중해에서는 금이 유입되면서 그 가치가 하락할 것이다. 머지않아 인도와 지중해에서 금의 가치는 매우 비슷해질 것이다. 그저 지중해 사람들이 금을 신봉한다는 사실 때문에 인도 사람들도 금을 믿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인도 사람에게 금을 사용할 실용적인 용도가 없더라도, 지중해 사람들이 금을 신봉한다는 사실 때문에 인도 사람들도 금을 믿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인도 사람에게 금을 사용할 실용적인 용도가 없더라도, 지중해 사람들이 이것을 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인도 사람들은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별보배고등이나 달러, 혹은 전자 데이터를 믿는다는 사실은 우리 또한 그것들을 믿게 만들기 충분하다. 설령 다른 사람들을 우리가 미워하고, 경멸하고, 조롱하더라도 말이다. 서로의 신앙에 동의할 수 없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돈에 대한 믿음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종교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반면에, 돈은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는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사상가와 예언자는 수천 년에 걸쳐 돈을 흉보면서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매도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한편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돈은 언어나 국법, 문화코드, 종교 신앙, 사회적 관습보다 더욱 마음이 열려 있다. 인간이 창조한 신뢰 시스템 중 유일하게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다. 종교나 사회적 성별, 인종, 연령, 성적 지향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신뢰 시스템이기도 하다. 돈 덕분에 서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종교나 사회적 성별, 인종, 연령, 성적 지향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신뢰 시스템이기도 하다."
돈 자체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돈은 부자의 5만 원권 가치와 가난한 자의 1만 원권 가치를 동일시시켜 작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류층이니 중류층이니 저소득칭이니 하는 사람의 차별적 급을 매기는 데는 돈이 필수적 도구로 작동한다. 언뜻 보면 불편한 이론 같지만 '인류가 지닌 돈의 관용성'을 생각하면 합리적 이론이지 싶다. 그 차별을 기준으로 적당한 사회정책이 나오니 말이다.
"철학자와 사상가와 예언자는 수천 년에 걸쳐 돈을 흉보면서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매도했다."
'돈이 모든 악의 근원',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의 많은 범죄가 이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