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이해 없는 '사실 비추기'의 아이러니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지금 우리 학교는>이 뜨거운 감자였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것과 별개로 선정성 논란에 휩싸인 것이다. 이 작품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좀비물인데 전개 과정에서 학교폭력과 성폭력, 미성년자 출산 등이 소재로 쓰였다. 감독은 현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는데 문제는 그 의도가 시청자들에게까지 닿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일련의 설정을 배우들의 연기로 구체화해 나열, 전시할 뿐 사안에 대한 창작자의 깊이 있는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남은 건 자극적이고 불쾌한 장면들뿐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 얘기를 먼저 꺼낸 건, 최근 본 뮤지컬과 무척 닮아있어서다.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돼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해시태그>다.
<해시태그>는 SNS의 시대, 저마다 비밀을 하나씩 품고 있는 열아홉 살 미성년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학업 스트레스로 SNS에 사칭 계정을 운영 중인 모범생 수진, 동성 친구를 짝사랑하지만 이를 밝힐 수 없는 남학생 찬영,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은데 도벽이 있는 지훈, BL 만화를 그리는 현아, 관심받기를 좋아해 SNS에 루머를 유포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승우가 그 주인공들이다.
어딘가 살아 숨 쉬고 있을 법한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에 이입할 수 없었다. 작품 속에서 모든 인물이 허울처럼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시태그>에서 각 캐릭터가 갖고 있는 비밀은 다음 전개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그것도 아주 잘못된 방식으로.
이를 테면 극 중 현아는 BL 만화를 그려 소장본까지 판매하는 그림러로 등장하는데 학교에선 이를 숨긴다. 그러다 우연히 수진에게 자신이 그린 만화책을 들키고, 그러자 도리어 수진에게 읽어보라고 제안한다. 이 장면에서 현아가 수진을 유혹하듯 노래를 부르면 다른 남자 배우들이 마치 수진의 만화 속 캐릭터가 된 양 등장해 수진을 둘러싼다. 그 안에서 수진은 충격에 빠진 것 같은 모습을 취한다.
현아가 그리는 장르가 BL인 점을 차치하고라도, SNS나 온라인에 글과 그림 등의 창작물을 그리는 크리에이터들이 늘고 그 가운데 청소년 비중이 압도적인, 그래서 더는 이런 활동이 꽁꽁 숨겨야만 하는 '오타쿠'스러운 취미도 아닌 세상에, 은밀하고 비장하게 자신의 취향에 대해 노래하는 현아나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 깜짝 놀라는 수진의 모습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현아가 만화의 한 장면을 그리기 위해 자료를 찾는답시고 동성애자인 척 전용 데이트 앱을 이용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이 장면은 후에 극 중 동성애자인 찬영을 아웃팅 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어진다. 찬영의 시련을 만들기 위해 현아라는 캐릭터를 몰상식한 인물로 그린 것이다.
그뿐인가. 현아는 수진과 지훈 사이의 갈등을 극대화하는 장치로써 도둑으로 몰리는 수모까지 겪는다. 다시 말하면 <해시태그>의 창작진은 현아란 인물을 통해 온라인 창작 활동에 몰두하는 청소년을 표현한 게 아니라, 단순히 극에 필요한 사건을 만들 수단으로 쓴 것이다.
승우란 인물도 마찬가지다. 극 중반부까지 반응 없는 친구들(지훈, 찬영)에게 장난을 걸며 유쾌한 모습을 보이던 승우는 사실 친구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찬영의 사진과 번호를 도용하여 동성애자 데이트 앱에 가입하고 이를 들키자 그 탓을 친구들에게 돌리며 끝내 자해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약으로만 이루어진 전개다. 승우가 거짓말을 해서라도 친구들 사이 혹은 SNS에서 관심받고 싶어 했던 이유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으면서 결말부에 가서야 승우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고 남의 탓을 하다 스스로를 해치게 만드니 도무지 캐릭터에 이입할 수가 없다.
찬영의 짝사랑 대상이자, 수진의 비밀을 의심하는 역할로 나오는 지훈은 더 처참하다. 이 인물은 '서사'라는 것이 없다. 도벽이 있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 가판대에서 무언가를 훔치는 장면이 짧게 나오지만, 그래서 도벽이 왜 생겼는지는 알 수 없고 수진의 손목시계(원래는 언니 수정의 것이다)를 훔친 것도, 그래 놓고 들킬 위험에 처하자 현아에게 덤터기를 씌운 것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설명되는 일이 없다. 그나마 <해시태그>에서 이 캐릭터가 메인이 되는 넘버 중 하나는 모범생 찬영에게 '어른들의 뜻에 따라 살 필요 없다'라고 말하는 내용인데, 그 내용이 올드하기 이루 말할 수 없어 이게 과연 2022년에 새로 올라온 창작극에서 내세운 넘버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물론 등장인물 전부의 서사를 촘촘히 만들어 관객에게 보여줄 수는 없을 거다. 그랬다간 공연 시간이 배로 길어질 테니까. 그러나 적어도 창작진은 자기가 만든 인물들에 애정을 갖고 있어야 한다(범죄자 캐릭터에 연민을 가지란 뜻이 아니다). <해시태그>에선 창작진의 애정과 고민이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메인 캐릭터인 수진과 찬영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다. 극 중 수진의 방황은 표면적이고 찬영의 고민은 겉돈다.
올 들어 최악의 90분(러닝타임)이었던 <해시태그>에서 그나마 건질 만한 게 있었다면 넘버에 대한 시도다. 소재가 소재이니 만큼 클래식보다는 현대적인 감성의 노래들로 구성됐다. 주로 가요, 그중에서도 힙합을 연상케 하는 넘버가 많고(랩도 있다) 안무 동작도 스토리텔링의 목적보다는 군무를 보여준다는 느낌이 강하다. 문제는 배우들이 이를 소화하느냐는 것인데, 대부분 어색하다. 그나마 거슬리지 않았던 건 승우뿐이었다. 그렇다고 안무가 트렌드 하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다. 연출 곳곳이 매우 구시대적이다. 별안간 캐릭터가 핸드 마이크를 쥐고 노래하면 노래방처럼 에코가 울리는데 매우 뜬금없을 뿐만 아니라 예스럽다. 의도하지 않은 올드함이라면 안타깝고 의도한 올드함이라면 의문이다.
전반적으로 2022년에 보는, 2022년의 고등학생 이야기라고는 믿기 힘든, 적어도 10년 전에는 나왔어야 획기적이란 평가를 받을까 말까 한 작품이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첫 번째로 창작진의 연령대가 어떻게 되기에 열아홉 살이 겪는 혼란을 이런 식으로 바라봤을까 궁금했고, 두 번째로 이 작품을 무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한 창작산실 심사위원단은 여전히 '기성세대'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진이든, 심사위원단이든 <해시태그>로 이 시대 젊은 세대의 삶을 조금이라도 비췄다고 믿는다면 정신을 차리길 바란다.
공연의 감상은 그날의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나로서는 메인 캐릭터인 수진에게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던 터라 다른 배우들로 본다면 또 느끼는 바가 달라질지 모르겠다. 다만 몰입하지 못한 덕에 이야기의 기승전결과 대본, 노래와 안무, 연출을 한 발짝 떨어져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재관람 의사는 없다. <해시태그>는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공연 중이며, 오는 20일 폐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