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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옆집작가 Jun 16. 2019

덕수궁 돌담길

 해가 찡긋 웃고 있는 어느 날,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었다. 한 걸음 그리고 두 걸음. 보폭을 이어나갈 때면 향긋한 초록빛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온다. 900m 남짓한 길 위에 오카리나 가락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빈 공간을 메웠다.  


 덕수궁 돌담길은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 덕수궁을 중심으로 에워싼 산책길이다. 이곳은 기존에 자동차가 다녔던 도로에서 보행자 중심의 도로로 재정비하면서 탄생한 공간이다. 사람과 자동차가 공존하는 공존 도로의 개념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된 사례이기도 하다. 


 연인, 가족, 친구, 직장인. 서울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와보았을 법한 그런 공간이 바로 덕수궁 돌담길이다. 다만, 한 가지 속설이 있다. 연인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 때 손을 잡으면 헤어질 수 있다니 이점은 참고하기를 바란다. 

 

 덕수궁 돌담길은 총 4 구간으로 나뉘어있다. 1번 코스는 영국대사관 정문에서 세종대로까지 이어진 길이다. 기존 돌담길에 문양을 넣고 다시 포장하여 돌담길과 어우러진 보행공간을 만들었다. 2번 코스는 영국대사관 후문부터 정문까지 연결된 보행로이다. 덕수궁 내측 보행로로 덕수궁의 모습을 볼 수도 있으며 나무와 풀이 어우러져 오피스 상권에서 자연을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개인적으로 직장에서 솔루션이 생각이 나지 않을 때면 머리를 환기시키기 위해 자주 찾는다. 3번 코스는 영국대사관 후문에서 대사관 직원 숙소 앞까지의 길이다. 덕수궁 출입문을 통해 나오면 바로 볼 수 있다. 4번 코스는 기존의 덕수궁 돌담길 구간이다. 길을 따라 이어지는 고목과 옛 건축물들을 볼 수 있으며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교회 등 다른 공간으로 확장할 수 있는 통로이다. 


 오후에 거닐었던 덕수궁 돌담길은 생기발랄함과 활기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직장인들과 연인들 그리고 방학을 한 학생들이 어우려저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날씨였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이야기 소재를 꺼내 들고 서로가 서로를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미소 가득 바라보고 있었다. 길 위에선 각자의 개인들이지만 덕수궁 돌담길과 어우러져 하나의 유기체가 되는 듯한 느낌을 오늘에서야 느끼게 되었다. 


 길을 걷기 전 나는 사뭇 다른 공간에 앉아 있었다. 적막함 속에서 거친 타자 소리만이 이 공간을 메웠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위 소리도, 가끔 들리는 민중의 가락도 침묵에 휩쓸린 이곳을 바꾸지는 못했다. 콘크리트로 높게 쌓인 허공 위에 앉아 그렇게 오전을 꾸역꾸역 버티었다.


 길이란 참으로 신비롭다. 오전에 눈꺼풀이 내려갔던 나에게 생기를 주었다. 마치 굶주려 있던 자가 밥을 먹고 힘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비록 직장 동료들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덕수궁 돌담길을 돌며 산책을 했지만 길 위에서 나의 마음은 초록빛 바람과 오카리나 가락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20세기 초에는 덕수궁 담장은 사랑의 언덕길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 공간은 덕수궁 돌담과 미국 영사관 돌담이 높이 쌓여있고 주변이 나무와 풀로 우거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젊은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기 위해 영성문 언덕길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10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고, 직장인들의 산책길이 되고, 숲이 우거지지 않아 덕수궁 돌담길 주위에 사랑을 은밀히 속삭일 장소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역할은 아직까지 톡톡이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점심을 먹고 덕수궁 돌담길 주위를 산책한다는 것은 나에게 윗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정치질을 하기 위에서도 혹은 동료들과 관계를 쌓아 뻑 좋은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힘든 일터에서 잠시 나를 다독여줄 그런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함께 나아가는 인생의 동료와 잠시 일상을 벗어나 자유롭게 혹은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마음을 한 발자국씩 가까이하는 것뿐이다.  


 일터에서 돌아와 돌담길을 떠올리니 길 위에서 받은 위로가 오늘따라 값지고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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