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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벌새날다 Jan 14. 2023

안녕, 싸이월드

싸이월드 백업 공지 뜨던 날 썼던 얘기들


"언니, 싸이월드 백업 했어?”

라고, 어느날 늦은 밤 오랜 지인인 지연이 톡을 보내왔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 그냥 뭐 백업해야 할 것들은 많지 않고 거기는 너무 흑역사가 많아서 그냥 역사의 뒤편으로 보내는 게 맞을 것 같아”

톡 말풍선 오른쪽의 1자가 없어지고도 한참 뒤, 지연은 이렇게 보내왔다.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도토 사진이 거기 너무 많이 있어서 그냥 없애면 정말 도토를 잊는 것 같아서 슬퍼서 안될 것 같아.”

도토는 몇 년 전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연의 반려묘였다. 그러게, 도토의 사진이 거기에 있겠구나, 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나는 더 톡을 보내지 못했다.


2000년대에 대학에 다니고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 중, 싸이월드에 추억 한 자락 묻어놓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도토 같은 반려묘의 사진을 올린 적은 없었지만, 나 역시 자명한 싸이월드 세대였다.


전 남친의 미니홈피에 발이 닳도록 들락거리다가 이벤트 당첨이 되는 천재지변의 사건을 겪어보지 않은 자 싸이월드의 적자라 말하지 말라. 일언반구 없이 일촌이 끊어질 때의 그 충격을 모르는 자, 한참을 고민하다 “일촌끊기”를 누르고 나서 천금보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어 보지 않은 자 사이버세계의 희노애락을 겪었다 말하지 말라. 일촌공개 사진이 하루아침에 블라인드가 되어버릴 때 그 사람과의 철벽같은 단절을 실감하던 시간들이 당신은 있었는가. 일촌 파도타기를 하다가 어디 저 대양주 앞바다까지 흘러 떠내려가 만난 알지도 못하는 선남선녀의 전체공개 사진 앞에 마냥 부러워했던 적이 없다면 당신은 싸이월드 이용자가 아니다. 지금은 카톡 프로필 바꿀 기력도 없이 잠들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싸이 대문 사진과 메시지를 바꾸던 날들. 다이어리를 열심히 써서 포도알을 모으고, 호화스런 미니룸을 꾸며 내 미니홈피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쌈빡한 인상을 주겠다며 흔연히 도토리를 결제했던 나날들. 행복한 싸이월드 생활을 위해 친히 디카를 구입했고, 매뉴얼 3번 정독 후 미친 듯이 사진을 찍고 사진첩에 업로드했던,


그래, 나는 싸이월드 세대였다. 난립하는 SNS 카오스 속에서 지금의 나는 페북도, 인스타도 안하는 SNS계의 낙락장송 같은 삶을 살고 있지만, 한때의 나는 싸이월드에 영혼을 불태웠던 여자다. 어쩌면 그때 싸이월드에 흑역사와 갖은 중2병 모드를 싸질러놔서 지랄총량의 법칙에 의거 지금은 아무런 SNS도 하지 않고 초연히 살 수 있는지도 모를,

그래, 나는 싸이월드 세대였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츠네오의 말이 생각난다. 세상에는 헤어지고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여자와, 헤어지고 나면 친구가 될 수 없는 여자가 있다. 조제는 후자였다, 라고.

츠네오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에는 추억 때문에 싸이월드를 백업할 수 있는 사람과, 추억 때문에 싸이월드를 백업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였다.

지연의 카톡을 읽으며, 그녀가 도토의 추억 때문에 싸이월드를 백업해야 한다고 한다면,

나는 오랫동안 사귄 대학 CC Y와의 추억 때문에 싸이월드를 백업할 수 없구나, 하고 나는 깨달아버렸다.


그런데 Y는 지금 뭐하고 살까.

페북이라도 하면 알음알음 소식이 굴러들어오는 모양이던데, 나는 페북의 계정도 없는 희귀동물(내지는 멸종위기동물)이고, Y 역시 그당시의 탑 트렌드였던 싸이월드도 내가 조르고 졸라서 일촌을 맺기 위해(그의 유일한 일촌은 나 하나였다. 일촌이자 유일촌, 이라고 그는 낄낄거렸었다) 가입한 인간인지라 페북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수많은 일촌을 맺고 그들을 나름대로 sorting 해가며 보여줄 수 있는 사진첩과 게시판의 공개등급을 조정했지만, 그에게는 모든 게시판과 모든 사진첩이 열려 있었다. 내가 Y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남들에게 보이게 올릴라치면 그는 질색팔색을 하면서도 수줍게 “퍼가요~”라는 자동덧글을 남기며 나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가져가곤 했다. 그와의 일촌명은 “멋진우리오빠” “예쁜우리**(내이름... 크악...)” 였었다. 그의 일촌평이 뭐였더라. “항상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멋진우리오빠 ***)” 였다. 여러 번 좀 바꿔보라고 성화를 했는데도 일촌평 히스토리는 늘 한 줄이었다.


아, 맞다. 커플일기장도 있었지.

커플일기장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천생염병들도 당시에는 많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후안무치하지는 않았어서 둘만 보는 것으로 설정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하염없이 글을 찌끄리기를 좋아하는 인간이어서 나는 싸이월드의 커플일기장에 무수히 많은 연서를 작성하였고 그는 즉독+즉해+즉답을 강요당하곤 했다. 내가 열 번을 쓰면 그가 한 번의 다이어리를 쓸까말까, 그러나 그의 마음이 글쓰기의 횟수처럼 옅은 것은 아니었다, 고 나는 생각한다. 마음은, 말이나 글로 표현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부분의 색이 더 짙고 풍부하니까.


마음이, 말이나 글로 표현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부분의 색이 더 짙고 풍부하니까, 라고 써놓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20대의 나는, 글로 사랑을 말하고, 말로 사랑을 보이고,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선물과 이벤트로 가득한 시간들이 사랑을 구성하는 원소들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싸이월드는 어쩌면 그렇게 생각했던 20대의 내가 뛰어놀던 놀이공원 같은 것이었는지도.


아무리 화려하고 일 이용자수가 많은 놀이공원도 매일 폐장을 한다.

저녁 시간의 불꽃놀이와 퍼레이드가 눈부시도록 빛나고 영롱한 이유는 그들이 폐장시간을 앞두었기 때문이다.


Y와의 연애는 대학시절 내내 즐거웠다. 평범한 연인들처럼 다투기도 하고 그러고 나면 샤워기를 틀어놓고 흐느끼는 드라마퀸 같은 모습도 있었지만 우리는 대체로 잘 맞았고 무엇보다 Y가 너그러웠다. 우리의 연애가 “좋았다”라고 기억한다면 많은 경우의 수는 Y의 덤덤함과 느긋함에 기대고 있을 것이다. 계획대로 잘 되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하고 신경이 곤두서는 나에게 Y는 천하태평하게만 보였지만 그래서 좋아했다. 나와는 다른 면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좋았다는 표현이 맞겠다. 싫은 게 없었다. Y는 까탈스러운 내게 신기하게도 싫은 게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 학번 차이였지만 학교는 내가 먼저 졸업했다. 나는 대학 졸업 전에 나름 안정적인 공기업에 취업이 되었다. 합격 통보 문자를 받던 그때도 나는 Y와 함께 학교 근처의 맥도날드에 앉아서 소프트콘을 먹고 있었다. 사람 많은 곳이라 망정이지 정말 소프트콘 날리면서 깨춤출 뻔한 걸 참느라 힘들었다. Y가 환한 웃음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축하의 말 마지막은 이랬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되겠네”


이제 나만 잘하면 되겠네, 라는 말을 할 때 Y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취업을 해서 연수를 다녀오고, 회사의 공채 동기들과 찍은 사진들로 싸이월드의 사진첩이 채워져가기 시작했다. 회사 근처는 유독 맛집이 많았고 정말 열심히 사진을 찍고 편집해서 올렸다. 내가 회사 근처의 새로운 식당, 술집, 카페를 개척해나갈 때 Y는 여전히 학교에 있었다. 쉽지만은 않은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내게는 묘하게 못마땅했다. 오빠같이 태평한 사람이 그 공부를 한다구? 내 농반진반의 질문에 상관없이 Y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같은 학교에서 매일을 만나던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면 선방하는 정도가 됐다. 커플일기장에 일기를 쓰는 날은 점점 줄어들었고 내 일촌평 게시판에는 새로운 이름들이 이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Y는 첫 시험에 실패했다.

괜찮다고 원래 어려운 시험이 아니었냐고 애써 그를 위로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보다 내가 더 실망한 것 같아서, 그런 나 자신이 참 많이 싫어져서 그날 우리는 일찍 헤어졌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3가 지오다노 앞, 커다란 광고현수막 앞에서 손을 흔들고 뒤돌아서던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고 그날 그의 일촌평이 바뀌었던 것을 기억한다. “항상 곁에 있어주면 좋겠어”


항상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라는 일촌평 옆에 “수정” 버튼을 누르고

항상 곁에 있어주면 좋겠어, 를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서 고민했을 Y의 구부정한 어깨를 상상해본다.


그 이후의 수순은 많은 이들이 예상하는 대로다.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을 보면서 아주 많이 울었던 이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도 결국은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들이 있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조제의 집을 나와버리게 된 츠네오가 새 여자친구 곁에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던 것처럼, “이별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한 가지 뿐이다. 내가 도망친 것이다” 라고 독백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친 것 뿐이다. 나 혼자 직장인의 세계로 넘어가, 아직 취업과 수험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그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합의된 이별이라는 그럴듯한 사유로, 나는 일방적으로 그와의 일촌을 끊었다. 그와의 사진을 모아놓은 사진첩들은 비공개로 돌려놓았다. 일촌이 끊어짐으로서 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일촌평 “항상 곁에 있어주면 좋겠어”는 하릴없이 사이버 세계의 어느 공간으로 스러져갔다. 함께였던 일상을 꾸준히 기록했고, 함께하지 못한 시간도 조용히 응시하게 해 주던 두 개의 공간의 연결은 사라졌다.


함께한 시간이 무척이나 길었기에 하나하나 사진과 글들을 가려가며 지워낼 수는 없었다. 통으로 다 삭제해버리기에는 연기처럼 스며들어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 폴더는 그냥 비공개로 남겨두기로 했다. 싸이월드는 천천히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그 후로부터 몇 년 뒤 싸이월드는 서비스들을 중단했고, 또 그로부터 몇 년 뒤인 오늘,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싸이월드에 버벅이며 접속했다.

홈, 과 프로필만 남은 나의 미니홈피 첫화면을 보다가, 나는 Y의 도메인을 떠올렸다.

이상하고 유치한 도메인이라며 내가 깔깔거렸던 그 미니홈피 도메인 주소를 쳤고,

둥실, 하고 그의 미니홈피가 떠올랐다. 일촌평이 하나도 없는 빈 집 같은 그의 미니홈피.

“Let bygones be bygones” 라는 제목의, 미니미마저도 말풍선 없이 아무런 장식 없는 방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의 미니홈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창을 껐다.


설정으로 들어가 다시 그 시간을 복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 글과 사진을 백업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구글링을 해서 그가 지금은 무엇을 할지 찾지 않는 이유는, 내가 마주친 그의 미니홈피 제목 때문이었을까.


나의 싸이월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듯이 흘려보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나는 노트북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그럼에도, 도토를 잊으면 안 될 것 같아 싸이월드를 백업한다는 지연도 생각했다. 그 공간에 자신의 젊음과 치기와 추억과 그리움을 남겨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공들여 적던 일기장과 영화평들, 가만히 한줄한줄 읽고 있으면 마치 그와 친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던 글쟁이들의 게시판들을 생각했다. 그 시절에 아이들을 키우며 아이들의 유년기를 싸이월드 안에 차곡차곡 기록했을 엄마들을 생각했다. 생각보다 힘이 센 추억들을 그 공간에 곳곳이 부려놓고 거기에서 발을 떼지 못할 나와 같은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기형도의 <빈집>의 한 구절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고, 애틋하고 가엾고 그립고 사랑스러운 추억들을 빈집에 가둔 채 돌아서나올 이들을 헤아려보았다. 안녕, 안녕. 나의 싸이월드. 나의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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