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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jay Mar 01. 2017

비밀은 없다, 2016

엄마는 미치지 않았다

<비밀은 없다>를 봤다. 일단 놀란 것은 그간 어떤 의미에서건 '아름다움을 연기'하던 손예진이란 배우의 정형화된 연기 패턴이 깨졌다는 사실이었다. 손예진의 연기를 보면서 이 영화의 감독은 절대 남성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회의원 선거와 딸의 행방불명. 

이 두 사건을 풀어가는 영화의 내러티브의 시작은 다분히 남성적이다. 아내의 내조 속에 권력의 치밀한 조작과 거래들이 남발하고 딸의 행방불명은 객관적 단서를 찾는 경찰과 선거라는 큰 그림 속에서 상대 진영의 행동을 의심하는 거대한 비밀, 음모가 있는 듯하다.


아이는 주검이 되어 돌아온다. 

아내는 갑자기 실성한 듯 이상한 이름과 이상한 전화번호로 경찰을 헷갈리게 만들고 선거 중인 남편의 캠프 사람들을 힘들게 만든다. 가는 곳마다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무례하게 군다. 역시 냉정함을 잃지 않는 남성 중심적인 사고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남자들의 사회가 이 문제를 정리할 것이다. (해결은 못하더라도 적어도 사건 '정리'는 할 것이다) 그러니 딸이 걱정은 되겠지만 아줌마는 그저 기다리며 안정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상한 행동들은 이내 실타래에 구슬을 꿰듯, 어려운 퍼즐이 그 윤곽을 드러내듯, 사건을 재해석해내고 연관성을 찾아간다. 다음 단계와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추리과정은 남자들의 세계, 그 투박한 상황 판단과 정리로는 담을 수 없는 미세한 끈을 따라 집요하게 파고든다. 아이의 노트, 노랫말, 인터넷 메일, 친한 친구, 선생님...


엄마는 미치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들은 세상에 무례한 모습이 되었지만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을 하고 관계의 복잡한 실타래를 풀고 자신의 위선과 싸운다. 엄마는 그간 자신이 생각하던 아이의 모습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 아이에 대한 신뢰 사이에서의 자신의 편견과 감정을 끊임없이 걷어낸다. 다른 (남자) 사람들은 그 아이의 행실, 의도, 그간의 일탈 횟수를 통해 객관적, 통계적인 추론에 이르고 섣불리 윤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사건은 흘러 흘러 비밀에 다다른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남편의 불륜이라는 '비밀'의 허망함에 있었다. 거대한 정치판에서의 암투와 그 사이에 발생한 아이의 죽음, 그것을 둘러싼 상대 진영에 대한 의심, 그 와중에도 아이의 실종과 죽음을 놓고 펼쳐지는 언론플레이. 판세의 역전... 그런 거대한 이야기, 남자들의 거친 암투 때문이 아니었다.

참을 수 없는 남자들의 가벼움. 

아이가 죽어도 영영 찾아내지 못하는 '냉철하고', '논리적인' 남자들, 그나마 착하고 멀쩡해 보이는 이 남자가 결국 자기 불륜 따위를 막겠다가 사람을 사서 자기 딸을 죽인 결말이 드러난다. 그 과정을 광기 어린 침착함으로, 혹은 과열된 집요함으로 엄마이자 아내는 묵묵히 사건을 해석하고 풀어내고, 마지막으로 심판한다. 그것도 남자들의 세계에서 보이는 피 끓는 복수가 아닌 합리적인 대가를 선물한다. 


영화는 한 사회의 거대한 프레임을 허물어뜨리는 남성 중심적 사고의 가벼움, '별 것 없음'을 폭로한다. 반면 비이성적이고 미친 것처럼 보이는 엄마는, 집요하게 달려들어 결국 진실에 닿는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연홍(손예진)의 뒤를 쫓다가 여지없이 해체되는 남성적 편견을 대면했다. 그리고 그게 이 영화가 수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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