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티베트 승려는 모래알 하나하나로 오랜 시간 정성스럽게 형형색색의 만다라를 완성하고는 작품에 가까운 만다라를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휙 하고 흩어 버린다고 한다. 그 당시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완벽한 삶을 추구하지만 애초에 그런 건 없다는 걸 상징하는 일화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난해 8월경 아는 도반님의 추천으로 '깨달음 수업' 카페에 초대되어 다시 각 잡고 다시 이 공부를 시작했다. 2015년 '진○○'이라는 모임에서 정말 우연히 죽비소리를 통해 생각 아닌 것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그 기쁨도 잠시, 담을 그릇이 없어 방황하다가 2020년 초 소공님과의 인연으로 후(後) 공부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진도가 잘나가듯 하다 연말에 고꾸라져서 공부모임에서 조용히 이탈되었다.
내가 이 공부를 접하게 된 이유는 건강염려로 인한 불안장애 때문이었다. 2014년 여름 심리적 아버지였던 작은 아버지가 살인사건으로 돌아가시는 경험 이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깊게 자리를 잡았고,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티베트 사자의 서'를 읽으면서 사후세계와 환생을 계획적으로 준비하기도 했었다. '나'의 생각과 노력으로 죽음과 환생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엄청나게 부풀려져 과잉된 생각으로 건강염려증과 그로 인한 우울과 불안장애를 겪으며 1년 이상을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온갖 신체적 이상감각, 비현실감 등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경험을 하던 중 우연히 얀케르쇼트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라'라는 책의 발췌 글이 기재된 블로그를 알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진○○'이란 공부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위에 말한 것처럼 죽비소리를 계기로 2015년 깨어남을 경험했다.
깨어나긴 했는데 어떻게 뒷수습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그걸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어 혼란을 겪다가 궤도 이탈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2016년 쌍둥이들이 찾아왔고, 이후 해병대 캠프 같았던 육아생활을 하느라 반강제적으로 가상현실 세계에 올인하게 되었다. 2018년 6월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같은 자식들, 안정된 직장 생활을 하며 더할 나위 없는 가상현실 세계의 행복을 만끽하던 중 부모님 두분 모두 드러누우시게 되는 일이 생겼다.
평소 알코올 중독이시던 어머니는 폭음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가셨다가 생환하셨지만 실명과 함께 불안 섬망, 욕창 후유증, 뇌졸중으로 인한 브로카 언어장애가 생기셨다. 곁에서 전전긍긍하시던 아버지는 평소 과거 뇌졸중이 있으셨는데, 이런 상황의 스트레스로 또다시 뇌졸중이 찾아와 거동이 어렵게 되셨다. 결론은 두 분 다 회복 불가능한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 되신 것이다. 이 두 사건이 2018년 6~8월 사이에 생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와 장모님의 마음에 큰 생채기를 내며 이혼 직전까지 가게 되었지만, 당시 세 살이었던 쌍둥이들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리산 종주, 백패킹 같은 힘든 취미에 의존하기도 하고, 옆길로 새서 백패킹 유튜브 영상 만드는 일에 빠지기도 했다. 회사, 육아, 백패커, 유튜버 등 한 사람의 몸으로 4명의 삶을 살았다.
어리석고 무모한 생활 끝에 결국 2019년 5월 대상포진으로 인한 람세이헌트 증후군(일명 구안와사, 한쪽 안면신경마비)이 생겼다. 예후가 좋지 않은 병이지만 운 좋게 2개월 만에 회복이 되었다. 그러다 2019년 말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2020년 순환 재택근무로 바뀌며 집 근처 카페에서 일을 하다가 소공님께 연락을 드리면서 위에 이야기한 후(後) 공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2020년 1년간 소공님의 블로그 글 정독과 불퇴전이라는 6~7명의 단톡방에서 도반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며 공부가 익어가는 듯 했으나 진득하게 보림 하지 못하고, 2021년 초 생각의 되치기에 크게 당해 건강 염려로 인한 우울 불안장애가 재발하여 다시 정신과 신세를 지게 되었고, 그로 인한 자괴감으로 공부모임에서도 소리 소문 없이 물러나게 되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를 가상현실 세계에서만 머물러 지냈다.
그 1년 반 동안 가상현실 세계에서 새벽 운동, 골프, 등산, 캠핑 등을 무의식에 강하게 새겨진 성실 강박을 통해 꾸준히 해오다가 2022년 7월 말 허리 디스크가 터져서 한순간에 그만두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깨달음 수업에 초대되면서 예전에 못한 보림을 각 잡고 하게 되고 돈오확철 선언에 살림살이까지 펼치게 되었다. 뭔가 술술 잘 풀려나가는 것 같을 때마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스텔스 전투기 같은 미세망념이 방문한다.
스텔스 전투기의 출격은 올해 3월 정도에 소공님께 꿈이 기억나는 얕은 잠에 대한 질문 카톡을 보낼 때쯤으로 추정된다. 소공님의 비유처럼 "석양의 노을을 보여주며 슬며시 어깨에 내려앉는 무게"를 알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얕은 잠의 원인이 긴장과 불안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내용인지는 솔직히 아직도 정확하게 모르겠다. 확실한 건 기승전 생사심.
두 달 전 점심 식사 후 걷던 중 물 마시고 뛰었을 때처럼 옆구리가 콕콕 쑤셨다. 그때 염려의 트리거가 당겨진 것 같다. 그 이후로 종종 그런 증상이 생겼고, 내과 진료를 받았으나 일과성 체간통일 거라면서 약도 처방해 주지 않았다. 공교롭게 그 무렵 바뀐 임원이 이빨을 드러내며 업무에 본격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양평 집에서 동생이 모시던 부모님을 요양원에 모셔야 하는 스트레스적인 이벤트가 발생했다.
얕은 수면은 계속되었고, 피로감이 점점 심해지고, 입안에 작은 구내염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을만하면 또 생겼다. 이거 베체트병* 아닌가 하는 의심과 염려가 또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정확히 2년전 상황과 동일했다. 소공님과 대화한 카톡을 뒤져보니 소름 끼칠 만큼 데칼코마니같이 동일한 염려의 내용이었다. 지금은 이렇게까지 알고 있으면서도 매 순간 당하고 있는 중이다.
* 원인을 모르는 면역반응에 의하여 여러 장기에 반복성, 폐쇄성 혈관염이 발생하는 만성 전신질환
양상은 이렇다. 구내염이 자꾸만 생긴다. 생사심에 기반한 생각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소한 가능성부터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분석한다. 사소한 것은 오래된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로 누적. 최악의 가능성은 암과 같은 치명적 질병의 전조증상. '혹시나, 이번에는 진짜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등등의 단어가 가장 많이 소환된다.
이러한 염려의 알고리즘은 재앙적 사고를 증폭시켜 심신에 지속적으로 적지 않은 데미지를 준다. 없는 병도 만들어 내는 노시보 효과*까지 더해 심신의 균형을 와해시킨다. 생각의 내용에 퐁당 빠져 동일시가 되어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 그 동안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놓여지고 물러났던 보림, 돈오확철, 살림 펼침이 형형색색 완성된 모래 만다라처럼 한순간에 흩뿌려진다. 대략 난감.
*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 : 어떤 것이 해롭다는 암시나 믿음이 약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효과
이 모두가 한 생각, 꿈의 일이다. 실상이 아닌 가상현실 세계의 일이다. 허상이고 가짜이다. 그러나 일체유심조. 이것이 전부이기도 하다. 현상계는 해석된 실상계이지만 그 자체가 완벽한 연기적 현상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지금 내가 동일한 괴로움을 반복적으로 겪는 이유는 손에 꽉 움켜쥐고 있는 것(건강, 관계, 소유물 등)을 놓지 않고, 천년만년 살고자 하는 생사심 때문이다.
이틀 전 오후 아내와 아이들이 갑자기 회사 앞으로 찾아와 급하게 반차를 내고 롯데월드에 다녀왔다. 전에 없는 일탈이었다. 자이로드롭을 보면서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숨통을 끊어낼 기개는 발휘하지 않고 한 줌 땅 뙈기에 바늘을 꽂아서 지팡이 삼아 매달리고 있는 '착각의 나'를 내던져 버리고 싶었다. 말만 그럴싸할 뿐 다이빙 포인트에서 바들바들 떨며 망설이고 있다.
죽어야 끝나는데 마지막 그 한 발이 안 떨어진다.
* 2023년 7월 22일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