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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직장 상사 이야기.

내 사수는 진짜 좋아, 다들 그렇지 않아?

by 권민창

굉장히 친한 직장 선배 C가 있습니다.
제 사수인데요, 나이차가 10살 가까이 나고
그만큼 근무년수도 많이 차이 납니다.
'야, 내 사수분은 진짜 좋아. 다들 잘해주지 않아?'
제 주변에도 직장인이 많아서 그런지 술 한 잔씩 하며 사수 얘기를 하곤 하는데요.
제가 저런 식으로 말을 하면, 레드벨벳 콘서트에서 아이린의 실물을 직접 보고 싸인을 받은 친구를 보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야, 너 로또 당첨된거야.'
아이린의 실물을 보는 게 로또 당첨과 같은 급인 거 같습니다. 오히려 전자가 더 행복할 수도 있겠죠.
그만큼 마음 맞고 좋은 사수를 만나기가 힘들다는 반증도 될 거 같네요.

작년 초였을까요, 근무지를 좀 변경하고 싶어서 고민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쪽으로 가고 싶었거든요. 제가 생긴 건 굉장히 시골스러워도 서울을 좋아합니다.
지하철 노선도 잘 찾고, 버스 환승할때 카드도 곧잘 찍어요.
사실 모든 직장이 그렇겠지만 근무지를 변경하는 게, 아이스크림이 입안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금방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제 부재로 인해 당장 타격을 받을 사수에게 말씀을 드려야하고, 그 위로 결재를 맡아 최종승인이 나야하겠죠.

참 좋은 분이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죄송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런 제 감정이 C에게 전달됐나봐요.
'민창아, 잠 오지? 커피 한 잔 하러 잠시 나갈까?'
아무 말 없이 밖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더라고요.
그리고 C에게 제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C는 제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민창아, 나는 전혀 신경쓰지 말고 니 마음이 이끄는대로 결정했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듣고 제가 도리어 화를 냈던 거 같아요.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당분간 후임자리가 공석이면 선배가 제 몫까지 일을 하셔야 되는데..'
그러자 그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너 일 별로 없잖아. 이 꿀쟁아. 아 다행이다. 후배 눈치보느라 매일 일하는 척 했는데 나도 이제 눈치 안 보고 놀아야지 너 가면.'
뭐 딱히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본인의 업무가 많아지고 직접적으로 피해가 오는 상황에서도 후배가 미안해할까봐 저렇게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정말 엄청난 그릇을 가진 사람과 함께 하고 있었구나, 그러니 나같은 모나고 뾰족한 가시덤불도 기꺼이 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이 제 생각대로 되지는 않더라고요.
결국 저는 근무지를 변경하지 못했습니다.
'선배, 생난리쳐서 미안해요. 열심히 할게요.'
그러자 C가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니가 만약 서울로 갔으면, 발전할 수 있는 기회에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근데 지금은 너라는 좋은 후배와 계속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드네.'

이렇게 공감하고 존중하며 상대를 건강하게 자극하는 말에서 좋은 관계가 싹트는 거 같습니다.
C라는 선배는 쓰레기가 있으면, '야 이거 치워.'라고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용히 본인이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는 사람이에요.
저도 그렇게 누군가에게 마음 깊숙이 존중받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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