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 아닌 것에서 거리두기

: 타인으로 인해 망가질 뻔한 소중한 삶의 순간을 지키는 힘

by 내이름은빨강


주말이면 혼자 계시는 시어머니에게 영상통화를 한다. 먹을 것이 없어 집 앞 마트에 잠깐 들렀다 왔는데 아이가 할머니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꽃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파리지옥이었다. 점심식사가 꽤 늦어진 시각이어서 통화를 하게 해 주고, 주방에서 급하게 식사 준비를 했기에 아이와 어머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몰랐다. 어머님은 이웃집에 가 계신지 '초코'라는 강아지를 아이에게 보여주시는 듯했다. 평소와 다르게 급히 전화를 끊으셨다.


오후 늦게 아이와 쿠키를 만들었다. 남편에게 영상통화로 다 만들어진 쿠키를 하나씩 보여주면서 자기 것과 엄마, 아빠, 외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모 것까지 만들었다고 자랑하는데 괜스레 미안해졌다. 시어머니께 다시 전화를 드려보았다. 아이에게

"할머니, 쿠키 만들었는데 한입 드세요."

해 보라고 할 요량이었다.


아이는 쿠키를 보여줬고 할머니는 칭찬과 동시에

“밥 먹어야 하니까 조금만 먹어”

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순간에도 나는 불 앞에서 딸기잼을 휘젓고 있었다. 아이는 맞은편에서 영상통화 중이었기에 그때까지 어머님을 보지 못했다.

계속해서 파리지옥을 자랑하고 싶었던 아이는 여러 차례 '파. 리. 지. 옥.'을 강조했지만 평소에도 아이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님이 일상용어도 아닌 '파리지옥'을 영상통화 상으로 알아들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결국 답답해진 아이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고, 어머님도 무슨 말을 하는지 물으셨다. 내 시선은 여전히 잼팟에 있었고 화면은 아이 쪽으로 놓여 있었다. 설명을 하자 갑자기 여러 목소리가

"아, 파리지옥~!"

하는 게 아닌가? 놀라서 아이에게 전화기를 받아 보니 어머님 뒤로 낯선 공간이 보였다.


"어머님, 어디 가셨네요?"

라는 내 말에 이어 아이는

"할머니, 거기 어디야?"

라고 물었고, 어머님은 웃으면서

"밀양"

이라고 대답하셨다. 두어 번 더

"어머님, 어디 가셨나 봐요?"

라고 물었지만 내 말은 들리지 않는 양 아이가 하는 말에만 대답하셨다. 멋쩍은 웃음과 함께.


짐작컨데 면목이 없으셨던 것 같다. 요즘 같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는 시기에 친구들과 멀리 가서 마스크도 쓰지 않고 한 방에 모여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들켜버렸으니까. 여러 번 물어도 대답을 피하시는지라 결국

"어머님, 재밌게 노시고요. 손 자주 씻으시고 마스크 꼭 끼시고 조심하세요."

로 인사말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슴속에서는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난주 내내 남편이 어머님 뵈러 가야 하지 않냐는 말에 주말에 시댁을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차가 없는지라 어린아이를 데리고 대중교통으로 움직이는 것이 조심스럽다. 친정식구들이 혹시나 싶은 가능성 때문에 오랜 기간 집에도 오지 않고 외출도 삼가고 노력하고 있는데 비해, 한 주간의 치열한 고민이 무색하게 이제 확진자 증가세가 좀 꺾였다고 친구들과 멀리 나들이를 가신 어머님이 생각 없없게 느껴졌다.


속마음이 훤히 드러난 얼굴을 아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잼팟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데 눈치 백 단인 아이가 말을 건넸다.

"엄마, 화났어? 그럴 때 엄마는 진짜 무서워."

역시나... 아이는 다 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이미 마음은 지금 저 냄비 속 잼처럼 부글거리기 시작했는 걸.

"아직 코로나도 안 끝났는데 할머니는 도대체 어딜 누구랑 가신 걸까?"

속마음을 털어놓고야 말았다.


그제야 아이는

"엄마, 아까 할머니가 강아지 보여줬을 때 있지? 친구 생일이라서 놀러 왔는데 다리에 쥐가 나서 못 움직여서 친구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간다고 말했어."

라고 했다. 어머님은 이미 아이에게 어디선가 1박을 한다고 말을 전하신 거다. 나를 의식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리에 쥐가 나서 집에 못 간다니... 피식 웃음이 났다.


아이 말에는 꼬박꼬박 대답하시면서 내가 물으면 잘 안 들린다고 하는 어머님. 악의는 없는데 사고를 치고 마는 순진한 개구쟁이 같았다. 작년의 팔 골절 사고가 떠올랐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사무용 의자에 올라가 지난 달력을 찢다가 60킬로그램이 넘는 몸무게로 자신의 팔을 깔고 넘어져 팔뼈가 산산조각이 났다. 때문에 지난해 내내 수술비는 물론이고 본인도 가족도 고생을 했다.


아직은 경계를 낮추기엔 안심할 상황이 아닌데 코로나-19에 취약한 노인들이 마스크도 안 쓰고 모여 앉아 먹고 마시고 주무실 것을 생각하니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일흔이 넘은 노인이 며느리 눈치 보느라 둘러댄 허술한 거짓말을 '귀엽게' 봐 드리기로 했다. 그날의 사고 후 수술비부터 온갖 후유증까지 묵묵하게 책임졌던 것처럼. 이미 일어난 일이고 마음 썩어봐야 나만 손해니까.


여태껏 어머님과의 관계에서 숨이 막힌 이유는 자신의 가치관, 생활방식으로 나나 남편, 아이를 판단하고 움직이려던 것 때문이 아니었던가? 누군가의 삶에 관여하는 것은 따스한 애정과 관심 정도에서 멈춰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수준의 바람직함은 아니더라도 본인은 최선을 다해 조심하실 것이라 믿을 수밖에.


게다가 시누가 몰랐을 리 없다. 걱정과 잔소리는 시누로부터 충분히 들었을 것이다. 거기에 한술 더 뜬다고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질까, 코로나가 종식될까?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내 마음 같지 않는 타인에 대한 불만과 적개심을 아이가 환기시켜준 덕분에 솔직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경을 쓴다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이 없으니 내 마음 둘 곳은 다른 곳에 있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정신을 차렸다. 눈 앞에서는 여전히 잼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하지만 뜨거운 열기에만 신경을 파느라 놓친 것이 있었다. 그제야 향긋한 딸기잼 향이 온 집안 가득 퍼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뭉근해지기 시작한 잼을 살짝 떠 후후 불어 맛을 보았다. 설탕을 조금 더 넣어도 괜찮겠다. 한소끔 더 끓고 나면 달콤한 잼이 완성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입에 침이 돈다. 옆에서 목을 빼고 있는 아이 입에도 살짝 넣어줬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표정을 짓는다. 덩달아 나의 마음도 부풀어 오른다. 불과 5분 전의 감정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냉동실에 얼려둔 모닝빵을 데워 갓 만든 신선한 잼을 듬뿍 발라 늦은 오후 간식으로 먹어야겠구나 생각했다. 꽤 괜찮은 토요일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