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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인 May 16. 2023

Feels like heaven

2023.04.18

오전에 방문하기로 한 집이 여간 마음에 걸렸다. 사진만 보았을 땐 방이 음침해 보이기도 했고, 시티센터와 너무 먼 곳, 그리고 루아스(트램)역에서 집까지 도보 18분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시티센터 근처만 붙잡을 수 없는 노릇이라 오늘 하루만 고생해 보자 하고 부리나케 준비해서 나갔다. 늦게 나온지라 시간이 빠듯했다. 그래도 구글에 나온 시간대로 버스와 루아스를 정시에 탑승하고, 길을 잃지만 않으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버스에서 동선을 곱씹는데, 리피강 건너기 직전에서 도무지 움직이질 않는다. 버스 기사가 교대되고 그래도 몇 분 안으로 출발하겠지 하며 기다리다 시간만 지체되어 버스에서 내렸다. 급하게 새로 검색해 루아스 정거장을 향해 걸어갔다. 



웹 사이트에 올라온 방 사진



족히 10분을 걸었는데도 역이 나타나지 않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차가 오든, 사람이 지나치든 약속 시간까지 점점 줄어드는 시간에 쫓겨 뜀박질에 가까운 걸음을 더 재촉했다. 그래도 루아스만 제대로 타면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루아스 타기 전 카드를 태그하고 탔다.(루아스는 탑승 전에 카드를 태그 한다. 첫 루아스 탑승 시 이 점을 몰라서 무임승차를 한 적이 있는데, 이때 적발되면 벌금을 물게 된다.) 그린 라인의 행선지가 정확히 적힌 루아스를 타고 나서야 한시름 놓았지만, 지하철 속도를 기대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오히려 시내 한복판을 달리니 버스보다 더 조심스럽게 천천히 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역까지만 무사히 시간 안에 도착한다면 승산 있는 모험이었다. 



Sandyford 역에서 모든 사람이 내리더니 이제는 기사까지 가방을 챙기고 내리는 것이다. 



- Is this last station?



물어보면서도 돌아올 답이 벌써 예상되었다. 



 - Yes. 



마치 2호선 신도림행을 타고 홍대입구를 가는 상황이었다. 기사는 내 목적지를 보더니 건너서 다음에 오는 차를 타라고 알려주었다. 안내해 준 대로 길을 건너 목적지를 향하는 루아스를 기다렸다. 옆에 같이 탔던 헤드폰을 쓴 남자에게 물었다. "이거, 내가 가려는 곳까지 가는 거 맞을까?" 그가 맞다고 대답해 주면서 왜 루아스가 멈췄으며, 멈춘 이유, 루아스가 어떻게 시내를 돌며 운행하는지에 대해 알려줬다. 



 - Are you visitor?



여행하고 있으며 아일랜드에서 1년 묵을 예정이라고 하니 그는 재빠르게 아일랜드 여행하는 법에 대해 소개했다. 시티는 이곳을 투어하고, 예술에 관심이 있다면 내셔널 갤러리를 방문해라. 주말에는 다트를 이용해 여행을 다녀올 수 있으며 너는 최상의 날씨에 찾아왔으니 여행하기에 완벽할 것이라며 그는 내 옆자리에서 열심히 설명해 주다 자신의 역에 다다랐을 때 가방을 챙기며 내렸다. 집 보러 가는 길의 버스와 루아스가 도중에 멈췄지만, 가는 길의 느낌이 꽤 좋은 신호처럼 느껴졌다. 


루아스에서 내렸을 때 빠져나가는 길은 사실 그닥 인상 깊지 않았다. 오히려 밤이 되면 좀 무서운 골목길이 될 거만 같았다. 하지만 앞장선 아저씨들을 따라 나서니(우연히 길이 겹쳤다.) 지금 내가 있는 더블린 7지역과 다르게 모든 것이 정돈된 평화로움이었다. 앞에 보이는 광활한 산은 스위스에 온 착각이 들 정도였다. 유치원과 그로서리 마켓 옆에 있는 집의 위치도 마음에 들었고, 벌써 주택에 질린 나로서는 오피스텔형 건물이 마음에 들었다. 


뷰잉을 반겨준 Dawid는 폴란드인이며 두 아이의 아빠다. 친절하게 반겨준 Paul은 들어가자마자 방을 소개해줬고, 이런 신속한 과정 덕분에 Paul을 만났을 때의 두려움은 들지 않았다. 방은 사진보다 훨씬 밝았으며 내가 필요한 책상이 내가 원한 창문 앞에 있었다. 창문은 통 유리창으로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왔는데 3층 높이어서 벌 같은 건 들어오지 않을 거 같았다. 아이들 방과 부부 방이 연이어지고, 부엌과 거실이 같은 공간임에 왜 순간 당황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이 가족과 가까워지려 노력이 필요할 만큼의 사이즈라는 걸 깨달아서 당황했던 거 같다. 


관리비에 대해서 물어보니 그는 서랍장 한켠에서 묵직한 관리비 영수증 파일을 꺼냈다. 그런 걸 모아두는 부부의 관리법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앞서 온 스페인 유치원 교사와 나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가 진짜 존재했을까라는 생각도 들긴 들지만, 일단 이 집을 계약할지 말지의 고민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나는 이 집을 깨끗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월세 지불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어필을 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악수를 하며 그렇게 우리는 구두 계약을 맺었다. 


순간적인 약속에 당황하여 나는 집을 나와서도 한없이 방황하며 친구에게 이런 빠른 선택이 맞는 것인지 물어보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끊고 동네를 돌아보니 이제야 좀 제대로 동네 분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집 앞 상가와 상가에 있는 클리닉, 그로서리 마켓, 레스토랑, 약국의 위치가 꽤 맘에 들었다. 루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마주친 주민은 웃으며 길을 비켜주었고, 유모차를 끄는 사람들이 여유로워 보였으며 나도 여유로운 마음에 나무에 핀 꽃을 사진 찍느라 한참을 그곳에 서있었다. 어떤 집에서 노래가 크게 흘러나왔는데 가사가 ‘Feels like heaven’이었다. 진짜 이제 그런 기분을 느껴도 될 거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 Carmel과 오늘 본 집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내가 입주일까지 좀 더 있어도 되겠냐고,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하자 그녀는 그럴 필요 없으며 자신은 주말에 휴가를 떠나는데 그때 편히 너의 집처럼 쓰라고 했다. 


어제의 궤도를 벗어난 기분이 다시 돌아왔다. 오늘은 모든 순간이 감사했다. 손을 모으고 눈을 감으며 기도하진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나는 '제발 이 무거운 감정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방 안에서 또 알게 모르게 ‘감사합니다’라고 다시 빌었다. 




방을 보고 다시 루아스 타러 돌아가는 길



이곳에서 지낸 지 보름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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