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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인 May 22. 2023

불안의 나무를 꺾는 대화

2023.04.20

친구 말대로 원체 기운 없는 애가 매일 외출했으니 피곤했을 법 하다. 오늘의 걸음수가 만 걸음이 넘었다. 평균 걸음이 8천 이상이니 평소에 5천 걸음 이하로 걷던 애가 무리한 것이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꿈에서 걷는 것처럼 무거웠다. 오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잤는데 돌아가신 할머니가 꿈에 나왔다. 나는 오랫동안 교회 수련회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빵집에 들러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할머니, 빵 사갈까?

- (대화가 기억이 안 난다.)

- 할머니, 전화 소리가 너무 멀리 들린다. 



수화기 너머 할머니 목소리는 더 아득히 들렸다. 마치 스피커폰을 켜놓고 수화기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할머니가 계속 말을 거는 거 같았다. 할머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할머니 목소리가 꿈에서 들린 건 생소한 순간이었다. 이전의 꿈에서 할머니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들린 꿈이 너무 아련했다. 어떤 장면에서 깼는지 기억은 안 났지만 혼미한 상황에서 기분이 계속 오묘했다. 의미가 있는 꿈이었을까. 그냥 오랜만에 꾼 꿈이었을까. 기분이 석연치는 않다. 힘든 것들(집 구하기)이 어느 정도 마무리돼서 긴장이 풀려 여기저기 피로 쌓인 것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아직 경직되었는지 속도 아리고, 목과 어깨 주변이 뻣뻣한 나무 죽지처럼 굳어있다. Carmel과 대화 후 머릿속에 '내가 사기(집 주인) 당하면 어떡하지'에 대한 불안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 (Carmel) 외국인이 아일랜드에서 집 사기는 힘들 텐데.. 그들이 네가 보기에 믿을만했니? 

- (나) 음..나도 사실 잘 모르겠어. 



사실 나도 확신이 없었다. 방 구하는 것이 너무 급해 좀 더 이성적으로 관찰을 하지 못했다. 냉장고에 붙어있는 가족들 사진을 보았지만 직접 만나본 상태도 아니었다. 그들이 실존 인물인지, 나랑 이야기한 사람은 알고 보니 곧 나갈 세입자인데 집 주인 행세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의 가지가 점점 뻗어나갔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고 나 자신과 대화를 했다. 



- 너, 오기 전에 사기당할 각오도 되어있잖아. 고작 300유로야

- 맞아. 근데 돈보다는 그 집에 들어갔을 때 집주인이 바뀌어있거나, 더 이상 내가 갈 데가 없을 상황이 올까봐 더 걱정돼.

- 그럴 때는 한인 민박집에 연락도 해보고, 최근에 연락한 한국인 동생한테 부탁도 해보고 Carmel한테도 부탁 해보자. 분명히 갈 데가 있을 거야. 우리가 다치거나 목숨 잃은 건 아니잖아.

- 맞아. 나는 근데 지금 너무 경직돼서 조금만 누가 건드리면 곧 울 수 있을 거 같아. 그럴 때 너랑 대화해야겠다. 들어 줄거지?

- 아무렴요. 

- 그래 나 지금 생존하려는 게 아니라 홀리데이. 여행으로 왔고, 이 시간을 이런 기분으로 허비할 수 없어. 시간으로 돈 벌 수 있지만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없잖아. 

- 그래. 지금 이 시간을 즐겨. 너는 귀중한 순간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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