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3
바빴던 건지, 아니면 쓸 이야기가 없었는지 그동안 일기를 미뤘다. 오기 전에 포부 가득했던 ‘매일 기록하는 삶’은 꽤 어렵다. 오늘은 느지막이 일어나 시티로 향했다. 나갈까 말까 반반의 마음이었는데 내일은 하루 종일 비가 올 거 같아서 억지로 나갈 준비를 했다. 집 밖을 나와서야 핸드폰 요금제가 만료돼서 데이터가 터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약 1시간의 거리를 구글 맵 없이 갈 수 있을까 조금 걱정되었지만 하차역만 알면 알음알음 찾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루아스(트램)를 타며 작은 도시를 구경했다. 어떤 곳은 영화 <HER>에 나오는 회사 건물이 듬성듬성 서있는 곳을 지났고(유럽 건물과 다르게 꽤 현대식 건물들이 많았는데 조잡해 보이지 않고 정돈된 편안함이 느껴졌다. 마치 비둘기 똥이 안 묻은 멀끔한 도시 건물이랄까.) 어떤 곳은 담쟁이에 다닥다닥 자라는 나무들이 빠르게 지나치는데 그 순간은 이탈리아의 여름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사실 이 구간에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고 그 생각에 온전히 집중한 순간들이 너무 좋았다. 어쩌면 루아스를 탄 횟수 중 가장 루아스를 온전히 즐겼던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왜 유독 오늘 그럴까 생각해 봤더니 다름 아닌 핸드폰의 부재였다. 그동안 루아스를 타면서 구글맵을 보거나, 친구들이랑 카톡으로 얘기하느라, 인스타를 보느라, 한국엔 무슨 기사가 떴나 3-4분 간격으로 그저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핸드폰을 보면서 차창 밖도 물론 보았지만 풍경을 보며 생각할 시간을 핸드폰에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걸 깨닫고서부터는 핸드폰 데이터가 터져도 가방 안에 넣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다가 결국 꺼냈지만.)
트램 안에서 생각했던 것들 중 하나는 내 피부가 가져다준 연결고리였다. 아일랜드 온 지 1주일만에 턱이 다시 난리 나기 시작했다. 충분히 이유를 알 거 같으면서도 본질적인 문제점을 못 찾고 있었다. 거울 속 나를 마주할 때마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못난 티가 나니 스트레스는 덤으로 생긴다. 그러다 피부가 나아졌을 시기를 생각하니 워홀 준비 때부터 확 좋아지기 시작했다. 회사에 그만둔다 이야기하고, 짐 정리, 필요한 물건을 부지런히 구매하고, 1년 치 만날 사람들을 한 달에 다 몰아서 만났다. 시간과 체력이 모자라 분명 스트레스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목적이 가까워지는 준비과정에 신나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다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꽤 스트레스 받으며 신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작 그 목적 바운더리 안에 입성했을 때는 그만큼 즐기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쉽지만.
여행을 준비할 때. 또는 포트폴리오를 만들며 힘들다고 투덜대지만 사실 무언가 바쁘게 하고 있을 때의 성취감, 면접을 돌아다니며 구직 준비할 때(취업이 안돼서 땅을 파던 시간이었지만, 예를 들어 하루에 면접 2개가 있으면 그 면접을 위해 밤새 준비하고, 모든 면접을 마친 후 ‘나 오늘 할 일 다 했다. 이제 즐기자’라는 안도감(아직 일을 못 구했는데도 말이다.)) 등등. 그래서 나는 지금 또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루아스 안에서 하게 되었는데 이런 생각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런 게 고찰의 시간인가라는 물음도 가지게 되었고 말이다.
내가 오늘 가장 좋았던 순간들 중 또 하나는 ‘Ladurée(라뒤레)’를 방문한 것이다. 자리가 협소할 거 같아 늘 지나갔었는데 오늘은 유독 생각나 들르기로 하였다. 양복을 갖춰 입은 젠틀한 아저씨 점원은 부드러운 인사를 시작으로 손님의 다음 대사를 기다린다. 앞에서 다른 손님들의 대화를 보고 나도 뭔가 자신 있고 편안하게 주문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내가 메뉴명을 이야기하면 그 대사들이 날개를 달아 날아가 점원 아저씨가 새 둥지처럼 포근히 감싸주고 그 둥지 안에 내가 원하는 마카롱을 담아줄 거 같은 안락한 느낌이 들었다.
종이 포장지에 넣어주려는 모습을 보고 테이블에서 먹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아저씨는 우아한 속도로 내가 앉을 곳을 봐주고 메뉴를 가져다주었다. 내가 선택한 피스타치오와 라즈베리 마카롱이 놓아졌고, 추가로 라뒤레 커피를 주문했다. 더블린에 있는 가게였지만 확실히 아이리쉬 카페들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서두르지 않는 음악과, 반짝이는 샹들리에, 간간이 들려오는 아저씨의 손님 응대 목소리, 웃으면서 서빙해주는 점원들과, 마카롱의 단 맛을 잘 잡아주었던 신맛의 커피. 모든 것이 우아했다. 파리에 가고 싶어졌다. 가격은 사실 그 돈으로 더 배부른 걸 먹을 수 있었지만 이 사치가 절대 아깝지 않았다. 나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하니 앞으로 이런 보상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만들어줬다. 앞으로 모든 게 잘 될 거만 같고, 내일부터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던 동기가 생기기도 했다.
문 닫을 시간이 되자 음악이 꺼졌고 문을 안에서 잠그기 시작했다. 계산을 하며 나는 내가 최대한 지을 수 있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인사를 나눴다. 내가 서버와 계산하는 동안 아저씨는 내가 나갈 때 문을 열어주기 위해 대기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우아한 경험은 다 이 사람 덕분인 거 같아 ‘메르시보꾸’라는 인사는 못했지만 ‘덕분에 행복합니다’라는 느낌을 전하고 싶어 활짝 웃으며 가게 밖을 나왔다. 카페를 나와서 길 건너기 위해 서 있는 그 순간까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김치찌개를 먹었을 때도 이 정도로 행복하진 않았는데 말이다.
어느덧 아일랜드 온 지 딱 1개월이다. SNS에는 사실 찡찡거리기 싫어(몇 번 한 거 같기도..) 무난하거나 좋은 순간들을 기록했지만 사실 외국 생활과 여행은 전혀 다름을 뻣뻣해진 어깨 근육을 통해 느낀다. 여행은 계획된 날짜에 충분히 즐겨야 하는 의무감이 있어 다른 어느 때보다 충실히 하루를 보내는 반면, 나에게는 아직 긴 시간이 있다는 생각에 많은 곳을 충실하게 돌아다니진 않았다. 기념품을 사는 게 아니라 반찬통, 데스크 램프, 프라이팬을 사는 차이 또는, 관광명소보다는 집을 보러 다니고, 생필품을 사러 다니고 돌아다니는 장소가 다른 점 등등. 거기에 집이 안 구해져 하루하루 시간 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아직도 균형을 못 찾은 입맛(그래도 이젠 요리를 할 수 있어 좀 챙겨 먹는 편이지만 확실히 양이 줄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덕에 매번 실패하는 빨래, 샤워하기 무서운 건식 화장실 적응기, 다른 가족과 같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타이밍의 필요성(화장실, 부엌 등), 미룰 수 없는 ‘정착’에 필요한 일들을 해내야 하는 ‘할 수 있다’ 마인드 장착에 대한 피로감.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를 배우게 되는 요즘이다. 나는 계획 짜는 걸 좋아하고 계획 실행하는 걸 매우 미루는 성격인데, 그 어느 해 보다 월별로 해야 할 일을 때에 맞게 수행하고 있다. 거주증 만들기 / 집 보러 다니기 / 초기 정착 준비하기. 5월엔 ‘필요한 일’ 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일도 좀 생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