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와 현대 사이, 사유의 단절을 다시 묻다
고대인들은 정말 우리보다 어리석었을까.
인간의 두뇌는 하루아침에 업그레이드되지 않는다. 유전적으로 내려온 뇌의 기본 구조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쉽게 과거의 인간을 ‘미개한 존재’로 정리한다. 불편한 질문을 덮기엔 그 말만큼 편리한 것도 없다. 하지만 고대 수학, 천문학, 건축을 들여다보면 이 단정은 금세 흔들린다. 정교한 천체 관측, 오차가 거의 없는 계산, 지금의 기술로도 재현이 쉽지 않은 구조물들. 단순히 “노동력을 갈아 넣었다”거나 “우연이 겹쳤다”는 설명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그래서 고대 문명은 늘 신화로 분류된다.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 신의 자손, 천상계의 지식. 아담과 이브, 환웅, 엔키, 비라코차. 문화권은 다르지만 구조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모두 ‘위에서 내려온 무엇’이 인간에게 질서와 기술, 법을 전해주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라 부르고, 상징이라 부르고, 은유라 부른다. 그렇게 이름 붙이는 순간, 더 이상 깊이 묻지 않아도 되니까. 안전해지니까.
하지만 한 번쯤은 반대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
왜 모든 문명은 이렇게 비슷한 이야기를 공유했을까.
고대인들이 남긴 유물들은 신화라는 완충 장치 없이는 설명이 매끄럽지 않다. 정밀한 천문 계산, 거대한 석조 건축, 고도의 금속 가공 기술, 심지어 전기적 원리를 활용한 듯한 흔적까지. 핵심은 “그런 기술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왜 사라졌느냐”다. 문명이 직선적으로 발전했다면 기술은 누적돼야 한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반복해서 끊긴다. 불연속, 단절, 그리고 재시작. 마치 몇 번이나 리셋이 걸린 것처럼.
종교는 이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해왔다.
“신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인간의 시대다.”
겉으로는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선을 긋는 문장이다. 과거의 지혜를 신화로 밀어 넣고, 인간은 ‘주어진 세상’만 탐색할 수 있게 만든다. 질문은 허용되지만, 결코 그 너머로 나아가선 안 된다는 질서.
흥미로운 건 현대 과학도 이 지점에서 종교와 완전히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과학은 종교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동 방식은 닮아 있다. 질문은 허용되지만, 결론은 정해진 범위 안에서만 인정된다.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경계가 생기고, 그 밖은 ‘비과학, 음모론’으로 분류된다. 이 순간 과학은 탐구가 아니라 관리의 언어가 된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 우리는 기술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저 사용한다.
AI의 내부 작동 원리를 몰라도 버튼은 누를 수 있고, 위성이 어떻게 떠 있는지 몰라도 신호는 받는다. 인간은 더 똑똑해진 게 아니라, 의존성이 정교해진 사용자가 되었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생각하는 능력은 자연스럽게 퇴화한다.
통제는 감옥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통제는 “생각할 필요 없음”이 일상이 되는 순간 완성된다.
교육은 암기로 축소되고, 질문은 시험에 나오지 않는 순간 사라진다. 역사에서 불편한 부분은 신화나 음모론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 느낀 의문을 스스로 검열하게 된다.
만약 고대의 ‘신들’이 실제로 지식의 전달자였고, 그 지식이 완전한 형태로 계승되지 못한 채 파편화되었다면, 지금의 인류는 발전한 존재가 아니라 관리하기 쉬운 버전일지도 모른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정보를 접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에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정된 상태.
그래서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말한다.
과거는 미개했고, 지금이 최고이며, 의심은 위험하다고.
하지만 이건 진보의 이야기라기보다 안심시키는 주문에 가깝다. 질문을 멈추게 만들기 위한 말들이다. 고대인이 우리보다 똑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그들이 지금의 우리보다 세계를 더 두려워했고, 더 조심스럽게 대했으며, 더 깊이 이해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태도 자체가, 기술 이전에 이미 하나의 지성이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기술이 아니라, 그 태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