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OO엄마예요"
어린이집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내 이름 석자보다 아이 이름에 '엄마'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육아를 위해 일을 잠시 쉴 때였는데 당시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가족과 아이의 동네 친구, 그 엄마들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모두에게 누군가의 엄마로만 불렸다.
'저 엄마는 내 아이와 친한 OO엄마, 저 엄마는 우리 윗집 사는 OO엄마'
다른 엄마들도 자신을 누구의 엄마로 소개했다. 사실 그렇게 자신을 소개해야만 상대가 누구인지 더 머릿속에 잘 기억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적응했고 나는 다시 구직 준비에 들어갔다. 이력서에 붙일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오랜만에 화장을 곱게 하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은 뒤 미리 예약해둔 사진관으로 향했다.
OOO씨죠?
사진사가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네?"라고 몇 번이나 되묻고서야 날 부르는 소리란 걸 알아챘다. '아 내 이름이 OOO지..' OO엄마로 불리면서 내 이름이 불리지 않은 기간은 고작 3년에 불과하다. 20년을 훌쩍 넘게 들어온 내 이름을 고작 그 3년 만에 잃어버리다니..
결혼 후 가장 많이 들은 내 이름은 OO엄마다. 남편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이름은 그대로지만 사람들은 OO아빠라고 불린다. 우리 부부 이름은 회사 그리고 학창시절 친구들에게서만 들을 수 있다.ㅋㅋ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빠라는 말을 왜 많은 사람이 사용하게 된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은 기념으로 OO엄마, OO아빠란 이름표를 붙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부르기 편하기 때문일까. 예컨대 자주 볼 일 없는 외사촌 남편 호칭을 찾느라 인터넷을 뒤적거리는 것보단 OO아빠로 부르는 것이 쉬운 것처럼 말이
다. 일부는 아예 엄마 아빠라는 호칭도 빼버리고 아이 이름을 대신 부르기도 한다.
누군가 들으면 '오버한다'고 할 수 있지만 오랜만에 들은 내 이름 석자에 어색함과 함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간 아내 그리고 엄마로 살아가면서 나 자신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 전부터 상당히 활동적인(?) 성격이어서 산후우울증이 심하게 오기도 했다. 이는 다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이기도 하다.
학창시절 내 꿈은 '엄마'가 아니었다. 더구나 내 이름이 '엄마'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마 다시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를 풀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을 듯하다.
자아를 잃은 상태에서 계속 반복되는 일상생활은 점차 엄마인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가끔 엄마도 OO엄마가 아닌 자기 이름과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시간을 통해 엄마가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면 아이 역시 더욱 건강한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엄마의 '자아 찾기'가 자신뿐만 아니라 양육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셈이다.
지금은 누굴 만나든 나를 소개할 때 이름을 먼저 말하고 누구의 엄마인지 소개한다. 나를 가리키는 이름과 OO엄마. 두 개의 자아를 모두 온전히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다. '엄마'라는 말은 여전히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스러운 단어이긴 하지만 내가 부모로서 열심히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내 이름은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하고 열정을 최대치로 끌어 올려주는 힘이다.
우리 가족을 살뜰히 챙기기 위해 순간순간 자신을 잊어가는 남편 그리고 아내를 위해 오늘은 OO아빠, OO엄마가 아닌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건 어떨까.
임지혜 기자 limjh@oliveno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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