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척스러움의 미학(美學
(억척스러움의 미학(美學))
실패한 사람은 아침에 눈들 뜨면 미적거리지만 성공한 사람은 아침에 눈이 뜨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조금만 더”라는 악귀가 금방 쳐들어온다. 극도로 지친 몸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쉽지 않은 일을 억척스럽게 11개월여 지속해왔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필요가 있다. 미련 때문에 머뭇거리면 결코 삶이나 역사를 바꿀 수 없다. 가볍게 아침을 먹고 걸으면서 몸을 푼다.
걸으면 뇌에 혈액 공급을 원활하게 하며 호르몬을 증가시키며, 가벼운 리듬이 뇌를 각성시킨다. 예로부터 위대한 철학자나 예술가 문인들은 많이 걸었다. 걸으면서 하늘의 영감을 얻었다. 우리는 수만 권의 책보다 대지를 걸으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사색한다. 모험에 나서 바람맞으며 온갖 고통과 장애를 넘어설 때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춰진다.
이제 오아시스 마을이 아니라 황허를 따라 생겨난 황토고원의 도시와 마을을 지난다. 황허는 중국인들에게 어머니 강이며, 황토고원은 중국 문명의 중요한 발원지이다. 황색은 황제의 색이며 땅의 색이며 강의 색이며 중국 사람이 처음 인식했던 바다 황해의 색이다. 황토고원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해발 1000~2000m 정도의 고원이다.
중국은 1년에 100개가 넘는 분당과 같은 신도시가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종웨이는 깨끗하고 아름답고 자연 친화적으로 개발된 조용한 도시이다. 이곳을 달릴 때 서울의 청계천처럼 도시 한가운데 길게 뻗어있는 호숫가의 버들가지가 얼굴을 기분 좋게 때린다. 주말 아침에 산책 나온 사람들의 표정이 한가롭다.
새색시의 얼굴만큼 크게 피어나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린 연꽃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초로의 남자가 오동나무 그늘에 앉아 연주하는 중국 대금 소리가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며 애잔하여 내 발길을 잡아 끈다. 다가가며 뇌수로 흘러드는 음의 결들을 음미한다. 낯선 음은 내 안에 들어와 내 고단한 여정을 위로하며 흘러나왔다. 소리로 내면의 시동이 걸리듯 불꽃이 튀어 올랐다. 음에 어혈이 풀린 듯 몸이 시원하고 정신이 맑아졌다.
지금 중국은 공산주의 이념과 천민자본주의의 거친 물결이 휩쓸고 있지만, 중국문화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사람을 중심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 사람은 예악(禮樂)을 통해 길러졌다. 예의 가르침은 윤리와 도덕이요, 악(樂)의 가르침은 예술교육이다. 악은 예술교육이나 미적 교육으로 체현되는 예술정신이다.
그것은 시를 쓰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구체적인 예술 활동보다는 그것을 추구하는 일종의 정신이다. 윤리의 정신과 예술의 정신은 서로 결합하여야 사람다운 사람, 고매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 된다. 도덕교육과 예술교육이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도덕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와 예술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가 만나 진선미가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삶은 바로 예술이 되는 것이다. 중국 고전에 의하면 만약 음악교육을 충실하게 받는다면 사람들의 눈과 귀가 밝아지고, 혈기가 온화해지고, 풍속을 변화시켜, 천하가 모두 평안하고 조화로운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가슴이 따뜻해지며 혈행이 좋아지는 것을 느낀다.
봉황은 대나무 열매를 먹고 오동나무에 깃든다고 했다. 나무에는 봉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대금 소리에 봉황이 깃들었다. 그의 입이 풀무가 되어 바람을 내뿜느라 볼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중국은 어디를 가나 공원에는 태극권 수련이나 제기차기 그리고 단체로 춤을 추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춤의 문외한인 내가 지르박인지 탱고인지 알 수는 없지만 흥겨운 음악에 맞춰 둘이 짝을 이뤄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춤을 잘 추는 것 같지는 않지만 즐기는 것 같다.
“잘못하면 스텝이 엉기죠. 하지만 그대로 추면 돼요. 스텝이 엉기면 바로 그게 탱고지요!”라는 말이 있다. 춤을 추는 사람들은 한가롭게 호수 위를 떠다니는 청둥오리처럼 여유 있을 뿐이다. 살다가 보면 스텝이 엉길 때가 많다. 하지만 그대로 놔두면 된다. 스텝이 엉기는 것이 인생이다. 즐기면 된다.
대지는 우주적인 자궁이다. 도심을 벗어나자 전원적이 풍광이 펼쳐졌다. 농토는 인간의 생명과 양분을 대는 탯줄과 같다. 농부들이 땀 흘려 농사를 지으니 모든 사람이 배고프지 않게 먹고 산다. 8월 초의 벼는 고개를 곧추세우고 한낮의 태양과 정분을 나누며 제 안의 사랑의 씨알을 익혀간다.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에 옥수수는 제법 속이 꽉 찼고, 해바라기 밭의 해바라기들은 서로 질투도 하지 않고 해만 바라보고 서 있다. 벌써 밀밭은 수확이 끝나 텅 비었다. 울 밑에선 대추나무는 다닥다닥 맺힌 대추 열매의 무게가 힘겨워 가지가 부러질 지경이다.
콩밭에는 콩을 수확하는 여인들의 호미 쥔 손끝이 아닌 저고리가 땀에 젖는다. 정수리에 맺힌 땀은 뱀처럼 가슴으로 파고든다. 콩 한 말이 땀 한 말이라 했다. 콩 한 말이 눈물 한 말이라 했다. 허리를 굽히고 일하는 여인의 넉넉한 엉덩이가 춤을 추듯 굼실굼실 바람에 흔들렸다.
긴 세월 삽 하나, 호미 하나에 땀과 눈물로 억척스럽게 일구어온 삶의 터전은 신의 영역처럼 신성하기까지 하다. 자기 손으로 일하며 숭고한 진실로 영혼을 살찌우는 단순한 삶이다. 저만치서도 그녀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에 비친 영롱함이 보이는 듯하다.
이미 곡식을 거둬들인 농부는 도리깨질을 하고 이어서 대 광주리에 곡식을 담아서 하늘을 향해 까불리면 알곡은 남고 검불과 껍질은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수로에 물고랑을 돌리려 삽을 들고 전기 삼륜차를 타고 지나가는 두 젊은 부부의 모습 또한 정겹다.
하! 농부들의 땀 냄새가 밴 흙냄새가 매혹적이다. 척박한 땅을 기반으로 끈질기게 살아내는 중국인의 모습을 본다. 들판의 곡식은 농부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땀을 먹으면서 자라고 무르익는다고 한다. 이 지역은 황하가 옆으로 흐르지만 아직은 반사막의 기후이다. 곡식이 무르익어가는 이곳의 땅은 중국인들의 악착같은 끈기와 기질, 의지를 말해주고 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하나하나, 땀방울 하나하나가 중국이라는 역사 깊고 거대한 나라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이런 농촌의 삶이 차츰 무너져가고 있다. 농촌은 바꾸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배워야 할 무엇인데도 말이다.
언뜻 보기에는 무뚝뚝한 이곳의 사람들의 억척스러움에는 예술적이기까지 한 아름다움이 깃들어있다. 아름다움이란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보이는 특별한 것이다. 그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문학작품이 펄 벅의 ‘대지(大地)’가 아닐까 생각한다. 평생 땀 흘려 농사 짓는 일 말고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땅을 갈아 밀과 벼를 심어 추수하는 일 외에는 모르는 왕룽의 우직하며 억척스런 모습이 이곳을 달리면서 겹쳐진다. 정주민들의 삶이란 흙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중국 농부의 억척스러운 모습에서 예술적인 영감을 얻어 노벨 문학상까지 타게 된 펄 벅 여사의 세계적인 문학작품 ‘대지(大地 The Good Earth)’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많다. 거대한 땅,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혹심한 가뭄과 홍수, 그리고 먹고 기댈 데 없어 이동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왕룽 일가의 고난과 핍박의 시작은 가뭄과 함께 벌어진다.
펄 벅의 대지는 중국의 어느 북부지역의 시골에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왕룽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소설은 빈농 왕룽이 황 부자 집 하녀 오란과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왕룽과 그의 아내 오란, 그리고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한 가족의 역사는 어느 왕조의 역사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의 흥망과 자연재해, 죽음, 사랑, 질병, 전쟁, 혁명의 서사시를 펼쳐낸다.
왕룽에게 있어 땅은 어떤 가치보다 우선한다. 기근이 닥쳐 남쪽으로 내려갈 때도 끼니는 거를지언정 땅을 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땅은 그의 모든 것이며 왕룽 그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땅을 가졌다는 자존심이 있었고, 땅으로 인해 굶주리기도 하고 부유해지기도 한다. 그는 모든 것을 땅에 바쳤고 땅은 그의 행복과 기쁨의 원천이 되었다. 왕룽은 어려운 고비를 만날 때마다 신앙처럼 자신에게는 땅이 있다는 것을 되뇌며 용기와 희망을 얻곤 한다.
왕룽은 죽음을 맞이하는 자리에서도 땅이 곧 생명이라는 진리를 외친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났어! 그리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땅을 갖고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땅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 땅에 모든 것을 바쳐 땅에서 모든 것을 얻고 결국 땅 앞에서 다시 늙어가고 쇠락해가는 농부들의 삶은 땅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집착과 집념, 끈기 같은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후에 펄 벅이 한국에 와서 한국의 농부에게서 깊은 철학적 깨달음을 얻고 간다. 어느 황혼 무렵, 일을 마치고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농부가 볏단을 반은 소달구지에 싣고 반은 자신이 지게에 지고 가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이 모습은 아주 이상하고 바보스러운 장면이었다. 소달구지에 볏단을 다 싣고 자신도 달구지에 올라타고 가면 편하고 좋을 것을 말이다.
펄 벅이 농부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소달구지를 타지 않고 힘들게 갑니까?" 농부의 답이 참으로 펄 벅의 머리를 죽비로 치며 깨달음을 주는 철학적 경구이었다. “에이, 어떻게 달구지에 타고 갑니까? 저도 하루 종일 일했지만, 소도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는데요. 그러니 짐도 나누어서 지고 가야지요.”
그녀는 이 모습을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오늘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밭두렁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서 두 부부가 점심 도시락을 함께 나누는 모습이었다. 가슴을 열고 보면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다.
세상의 이치가 다 그렇듯이 대지 또한 인간에게 언제나 땀 흘린 만큼 소출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홍수와 가뭄 메뚜기 떼의 습격 같은 해충의 피해 등 천재지변이 시시때때로 몰아치지만 그런 하늘의 심술을 인내로 감내하고 나면 다시 대지는 풍성한 열매를 내어준다. 농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면서 부족함을 자각하며 겸손해하며 하늘을 경외하고 늘 감사한 생활을 한다.
농부의 마음과 깊은 교감을 나눈 내게 폭염과 고열 따위는 이제 큰 장애가 못 되었다. 사실 심각한 고려 없이 뛰어든 길인지도 모르지만, 하고 싶은 건 못 참는 성격이 이 길로 나를 내몰았다.
일단 길 위에 뛰어든 이상 나는 살아서 완주해야 한다는 본능적 몸부림이 나를 야생의 표범처럼 강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밤새도록 물 설사로 다 쏟아내고 아침 점심 만두 한 개, 계란프라이로 때우고 저녁 한 끼 제대로 먹고도 다음날 42km를 거뜬히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