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과 사드
(만리장성과 사드)
언제나 질척한 사랑을 꿈꾸었지만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늘 고독의 늪이었다. 베이징 입경을 앞두고 원불교에서 대규모 응원단이 찾아 왔다. 1년여 홀로 아시럽 대륙을 달리는 길에는 갖은 역경이 다 찾아오지만 가장 힘든 것은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이 쩍쩍 갈라지는 마음의 건조함이다. 혼자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던 고독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끌어내 주는 기쁨을 맛보았다. 고독이란 언제나 자신의 몫이지만 함께하는 사람이 가져다주는 든든함과 따뜻함으로 새로운 힘을 얻는다.
끝없는 사막을 한여름의 이글거리는 땡볕 아래 지나고 나서 찾아온 응원단은 단순한 기쁨이나 위안을 뛰어넘는 가뭄 끝의 빗줄기 같은 것이다.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처럼 그들이 찾아와서 힘이 다 소진되어가는 내게 힘을 불어넣고 갔다. 대구 경북교구장 김도심 교무님, 왜관 교당 박형선 교무님을 비롯한 8명이나 와서 힘을 실어주었다.
대부분 사드를 성주에서 빼내기 위하여 지난 2년여 생고생을 하신 분들이다. 어머니와 아내도 찾아와서 1년 만에 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 후원회의 송인엽 대표님과 오경환 공동대표님까지 와서 힘을 보탰다. 베이징의 원불교 교도들도 함께 중국식당의 원탁에 둘러앉았다.
나는 그동안 달려온 16개국 구석구석을 안내했고 그들은 눈의 동공을 조이며 아련히 내 이야기를 따라 여행을 떠났다. 나는 관광안내자가 되어 열심히 세계의 구석구석을 안내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받아든 아이들 같은 표정들이었다. 평소에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지만 1년여 말벗 없이 지내온 내 혀는 더 굳어졌었는데 오랜만에 많은 말을 쏟아 부었다.
그 힘으로 그 옛날 만주군보다도 가볍게 팔달령을 진격해 넘는다. 고개를 넘어 베이징 한복판으로 들어선다는 기분은 찬란한 황금 유적으로 가득한 고분을 몰래 파헤치는 도굴꾼들의 놀라움과 흥분에 비견될만했다. 베이징의 역사는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수도 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고개만 넘으면 중원에 가득한 전쟁의 악귀들과 제국주의의 악령, 못된 자본주의의 온갖 편법과 탈법 일시에 제거하고 평화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힐 것 같다. 용이 꿈틀거리듯 능선을 타고 길게 뻗어나는 장성의 모습이 과연 장관이다. 북방의 침입자들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넘었을 팔달령의 만리장성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넘는다. 언제나 성 앞에 서면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기가 팽팽하게 느껴진다.
평화의 이름으로 오랜 제국의 심장에 뛰어드는 기분은 참으로 묘하다. 미대륙횡단 마라톤 때 워싱턴에 들어설 때의 기분도 이랬었다. 북방민족이 베이징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통로가 팔달령을 통과하는 루트였다. 만리장성은 지금 내가 달려서 넘는 산등성이를 타고 끝없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 장성은 명나라 때 개축한 것인데 명 왕조는 이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온 국력을 소모했다. 기록상으로는 당시 장성 방어선을 지키는 상주병력만 70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만주족이었으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며 가장 긴 61년간 재위한 강희제, 청나라가 팔당령의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한 지 50년 가까이 흐르고 정권이 안정되어가는 1691년 지금의 건설부 격인 공부(工部)의 장관이 황제에게 보고를 올렸다. 만리장성 성벽이 많이 무너졌으니 대대적인 보수를 할 수 있도록 허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강희제는 단호하게 '노(NO)'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수리할 필요는 없다. 진나라 이후 역대 왕조가 장성을 구축했지만 전쟁은 끝이 없었고 나라를 지키지도 못했다. 나라를 지키는 도리는 덕을 쌓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데 있을 뿐이다. 쓸데없는 공사로 공연히 문제를 일으킬 필요 없다." 역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다운 결연하고 자신감 있는 대답이었다.
그의 말처럼 만리장성은 중화제국을 지키지도 못했고 중국 백성들을 평안하게 보호하지도 못했다. 남쪽과 동ㆍ서쪽 국경선을 빼고 북방에서만 이런 병력이 동원됐다면 그 예산과 국력의 낭비는 엄청났을 것이다. 만리장성이라는 견고한 성을 쌓고도 200년 이상 유지한 중화제국은 없었다. 강희제의 혜안은 대단했다. 만리장성은 몽골족의 침입도 만주족의 침입도 막지 못했다.
그런 장성을 보수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엄청난 국력을 낭비하느니 그 예산과 열정으로 국민의 복지와 교육에 투자하여 민심을 얻어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의 기초를 다지는 데 전념했다. 이제 만리장성은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외국의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 자리에 존재하는 듯하다. 이 팔달령 고갯길에 이민족의 침입이 아니라 가을바람이 기분 좋게 넘어오고 있다. 그 위에 평화의 발걸음을 싣는다.
마찬가지로 사드로는 북의 미사일도 전쟁도 막을 수가 없다. 쓸데없는 사드 도입으로 사달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사드 배치를 결정할 당시 안보를 위하여 배치한다고 강변했지만 사드 때문에 한반도를 최대의 안보위협에 빠트리고 말았고 우리의 국익을 여지없이 요격하고 말았다. 사드는 방어적 무기이기 때문에 주변국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아무리 항변해봐야 소용이 없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도 그렇다. 쿠바가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배치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쿠바의 입장에서는 미국으로부터의 최소한의 안보적 담보가 필요했다. 미국의 대응은 단호했지만 쿠바가 그냥 물러난 것도 아니었다. 쿠바는 미국으로부터 불침략 공약을 얻어냈고 소련은 터키 배치 미국 미사일 철수를 얻어냈다.
우리가 할 일은 종전협정, 평화협정 맺고 민간교류의 물고를 트는 일이다. 진정한 평화를 얻으려면 우리가 꿈꾸는 것, 우리가 바라는 것만 주장하면 안 된다. 북쪽의 풍부한 자원과 그곳을 경유해서 들어올 값싼 석유와 가스, 값싼 노동력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입에서 자만심에 가득한 오만함이 느껴진다. 남북을 함께 담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우리를 가두었던 상상력의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한다. 우리가 마음대로 생각하고 상상했던 북한을 제대로 알아야겠다.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와 있는 북한의 첨단 기초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북한이 무기를 만들던 기술과 정보통신 기술, 인공지능(A.I), 안면인식 기능 등 기술은 세계에서도 우뚝 솟는 업적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것들과 남의 자본과 상용화 기술, 마케팅 능력이 합쳐지면 그 힘은 우리가 상상하고 꿈꾸던 세상 이상의 세상이 곧 펼쳐질 것이다.
“분단은 우리의 사고까지 분단시켰습니다. 많은 금기가 우리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았습니다.”-문재인 대통령.
어쩌면 가장 쉬운 금기 중의 하나인 압록강을 넘는 일, 그 가장 쉬운 금기 하나를 깨기 위하여 이렇게 어렵고 먼 길을 돌아 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국제 정세 탓만 하고 앉아 있기만 할 때가 아니었다. 지정학적 역학관계만 고려할 때도 아니다. 미국의 눈치만 보고 있는 정부를 믿고 팔짱만 끼고 기다릴 사항도 아니었다. 우리가 나서자! 무엇이든 아이디어를 짜내고 무엇이든 행동하자! 우리에겐 위대한 미래가 있다.
만리장성을 넘자 베이징 시내가 미세먼지로 뿌옇게 보인다. 13세기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건설한 곳이다. 수도는 황제의 도시이자 용맥(龍脈)이 흐르는 요충지이다. 이곳에서 그는 ‘아시럽 대교역권’을 구상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유목민의 군사력과 중국의 경제력 그리고 무슬림의 상업을 결합하여 아시럽 공영권을 꿈꾸었다. 그는 관세를 철폐하고 지폐를 발행하여 은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체제를 만들었다.
베이징은 그로부터 지금까지 900년 가까이 중국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다. 북쪽으로는 산이 도시를 방비하여 역사 이래로 골칫거리인 북방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고 호수와 맑은 샘이 많아 수자원이 풍부해 수도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
5천 년간 세계 초일류국가 국가였고 200년 2류 국가였다가 다시 힘차게 융기하는 베이징은 만 가지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 제일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일 것이다. 그 삶을 제일 잘 엿볼 수 있는 곳이 중국의 오래된 골목이다. 구시가지의 후퉁(胡同:골목)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매력적이고 묘한 분위기로 정감이 넘친다.
멋스럽게 낡은 건물, 소박한 사람들, 자전거, 날것 그대로의 아늑함은 나그네의 발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중국인 특유의 편한 옷차림(속옷에 가까운)으로 문밖에 나와 이웃과 나그네에게는 소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급속한 경제발전에 따라 골목길은 점점 사라지지만 중국의 영혼과 전통적 가치를 이곳만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곳도 드물다.
힘에 굴복하여 청나라에 연행사로 온 대부분 조선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무시하다가도 베이징에 도착하여 화려한 문물을 만나면 주눅이 들고 말았다. 이젠 무력의 힘이 아닌 문화의 힘에 굴복하게 마련이다. 상상하지도 못한 화려함과 선진 문명을 마주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둘로 나뉜다. 맹목적으로 사대를 하거나 애써 외면하면서 아직도 허세를 부리거나.
내가 지금 나보다 먼저 이곳에 왔을 우리 조상들이나 선배들의 흔적을 찾듯 박지원도 연행 길에 자기보다 먼저 왔던 친구들이 자랑으로 들려주던 장소를 우선으로 찾았다. 그때도 뉴욕에 가면 으레 타임스퀘어를 찾는 것과 같은 여행의 명소가 있었다. 베이징을 다녀온 사람들이 최고로 손꼽는 관광지는 요동 천 리 넓디넓은 들판, 구요동 백탑, 연도의 시가와 점포, 유리창, 서산의 누대, 동악묘 등을 꼽았다.
유리창을 찾은 그는 이곳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려주던 친구들에 대한 소회에 젖는다. 후퉁 가운데서도 천안문 가까운 곳에 있는 ‘유리창’은 특별한 곳이다. 창은 공장이라는 뜻이니, 이곳은 원래 명나라 때부터 왕실에서 사용하는 유리 기와를 굽는 곳이었다고 한다. 해가 비치면 황금빛으로 빛나는 자금성의 노란 유리 기와이다.
당시 베이징의 도서 시장은 내성에 있었는데 강희 연간에 기와 공장 감독자가 이곳에 상가를 만들어 분양한 것이 서점가가 되고 민속 문화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곳은 그 옛날 우리의 지성들이 메카처럼 인생에 한 번은 오고 싶어 하던 곳이다. 27만 칸에 달하는 서점과 골동품 가게들이 즐비한 지식의 보고 같은 곳이다. 조선의 여행자들이 이곳에 오는 주된 목적이 서적 구매였으니 중국인들도 그 열기에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서점은 10만여 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는 곳도 있는데 그들은 이곳의 출판 문화의 발전을 보고는 중국이 문명의 숲이라 여기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조선의 책이 팔리기도 했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이 ‘동의보감’이라고 한다. 세계의 지식은 이곳으로 흘러오고, 이곳에서 흘러나갔다.
가게마다 걸려있는 다양한 붓이 눈길을 끌게 한다. 중국의 한자와 필묵 문화는 한, 중, 일, 베트남 등 동북아시아에서 공유되던 특별한 문화였다. 시와 서예, 수묵화는 문인들의 일상이요 예술이었다. 선비들은 서예를 통해 자신의 마음까지 갈고 닦았다. 그래서 그들의 삶 자체에 잔잔한 묵향을 짙게 배었는지도 모른다. 스티브 잡스가 대학을 중퇴하고 서체 강의를 청강한 것이 애플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베이징에서 사흘간의 꿈같은 휴가는 노영민 주중대사의 극진한 환대와 남북연락사무소가 설치되면 그곳을 통해 내 이야기를 북측에 전달하겠다는 언약과 베이징 한인회가 준비한 환영 만찬과 그다음 날은 평통에서 주체한 환영 만찬, KBS 촬영, 또 원불교 베이징 교당 법회 참석 등 바쁜 가운데서도 마지막 날 친구들과 오붓하게 모여앉아 은어처럼 40년 세월의 강물을 거슬러 올랐다. 악동 시절 즐거웠던 이야기보따리를 베이징 가을 하늘에 풀어 날리는 시간이 단연 소중했다. 그때 또 은숙이 이야기가 천일야화처럼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