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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명구 May 19. 2022

아시럽에서 발로 쓰는 명상록 120

넘어지는 0.5초 사이

       (넘어지는 0.5초 사이)     

 다시 넘어졌다. 왼발이 무언가에 걸렸다고 느끼는 순간에서 넘어지기까지 0.5초나 걸렸을까?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뒤쪽에 있는 오른발을 빨리 앞으로 끌어 착지를 하려 했지만 늦었다. 힌두교의 신 시바처럼 순식간에 내 몸에서 수많은 손이 돋아나와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지만 무너지는 몸의 균형을 바로 잡지는 못했다. 평소의 체력 같았으면 충분히 균형을 잡았을 것이다.


 그 순간 길옆 플라타너스 가로수에서는 이 가을 첫 낙엽이었을 낙엽이 한 장 나뭇가지에서 분리되어 바람의 파문을 따라 휘청거리면 떨어지고 있었다. 상황을 감지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면서도 해결 능력이 없이 당하고 말 때 생기는 쓴웃음이 내 입가에 맴돌았다.

 이제 0.5초 사이에 내가 넘어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넘어져야 한다. 공중그네나 외줄 타기 곡예사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넘어지는 방법이라고 한다. 유도나 태권도에서도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기술을 배우기 전에 잘 넘어지는 낙법을 먼저 배운다. 이제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넘어지되, 잘 넘어지는 수밖에 없다. 충격을 줄여 최소한으로 줄여 넘어지는 방법이 낙법이다. 이제 나는 멋지게 넘어지고 멋지게 일어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 낙엽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바퀴 22개 달린 괴물 같은 트럭이 사정없이 지나가자 핵폭탄이 터질 때 일어나는 버섯구름이 일어나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는 먼지구름에 쌓여서 북적이는 시장의 그 누구도 내가 지금 넘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연이어 공포의 삼륜차가 죽음의 검은 매연을 시커멓게 내쏟으면 벽돌을 싣고 통통통 통 소리를 내며 반대 방향으로 지나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60년대에 사라져버린 삼륜차가 이곳 매연의 주범이다. 중국 공안은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에는 단호하지만 매연에는 너그럽다.



 65kg의 내 몸은 바닥을 향해 무너져 내렸고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면 자세를 최대한 낮추어야 했다. 전반기, 중반기까지 넘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지난달에 도로에 박힌 못에 걸려 넘어지더니 이번에도 다시 못에 걸려 넘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 이 평화마라톤이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는 걸 느낀다. 체력이 조금만 더 있어도 그렇게 허망하게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바로 잡았을 것이다.

 내 바로 앞길 옆에는 즉석에서 전병을 구워 파는 행상이 있었고 그 먼지 속에서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명의 남자가 전병을 받아들고 먹고 있었으며 두 명의 여자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 위지엔(옥전)을 지나 작은 마을의 시장판을 막 지나려는 참이었다. 이 길은 연암 박지원이 한양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 박천, 의주 풍성, 요양, 거류하를 거쳐 베이징으로 가서 다시 우리가 피서산장으로 부르는 열하로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위해 가던 그 길을 거슬러 가는 길이다. 이 길은 한중문화교류사의 중요한 길이기도 하다.


 관내정사(關內程史)는 열하일기 중에서 산하이관에서 연경까지 가는 길에 쓴 글이다. 그중에서도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한문 단편소설로 유명한 호질은 이곳 옥천의 한 가게의 벽에 붙은 글을 일행인 정군과 함께 베꼈는데 숙소로 돌아와 다시 보니 정군이 베낀 곳에 그릇된 곳이 많아 빠뜨린 글자와 문맥에 맞지 않아 손을 본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 유명한 박지원의 호질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인 것이다.

 연암이 시장에서 갖가지 색의 뱀을 구경했다는 곳도 이 부근일 것이다. “뱀은 고치기 힘든 부스럼의 약재로 쓰이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또 다람쥐, 토끼, 쥐, 곰의 재주를 보여주며 동냥하는 사람들도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어느 나라든지 시장판은 시끌벅적하고 분주하지만 중국의 시장판은 더욱 요란하고 생기가 넘쳤다.


 길가를 따라 햇과일을 가지고 나온 과일 장사들이 늘어섰고, 개와 염소, 오리와 닭, 거위에 비둘기까지 매물로 나왔다. 그 한쪽에는 자라를 즉석에서 고아서 파는 사람도 보였다. 넘어지면서 조금 전에 본 양의 선한 눈동자와 개의 동공이 풀린 눈동자가 자꾸 눈에 밟힌다.    

 

 연암은 1780년 음력 6월 24일 280여 명의 대규모 사신단이 압록강을 건넜다. 열하에는 온천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건륭제 치세에 이곳에 피서산장이라 불리는 장대한 별궁을 지어 매년 여름 이곳으로 순행하여 장기 체류하곤 했다. 마흔넷 생의 한 고비를 넘어가는 길목에서 박지원은 4촌 형 박명원의 제의로 아무 직책도 없이 그가 동경과 열망을 품었던 베이징 여행길에 나섰다. 그때 나이 사십이면 지금 내 나이 환갑에 길을 나선 것과 비견된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발전상을 여러모로 증언하면서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할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한다. “그 번화하고 가멸함이 비록 연경에 이른들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생각된다. 중국이 이처럼 번영할 줄은 참으로 뜻밖이다.” 연암은 연경에 도착하기도 전, 이곳을 지나면서 이렇게 발달한 중국 문명을 바라보며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지나면서 보는 미용실은 한국식 머리 스타일이라는 간판이, 옷가게에는 한국식 옷, 음식점은 한국식 구이. 등 한국 따라 하기에 바쁜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열하일기는 단연 세계 최고의 여행기이지만 당대에는 뜨거운 감자였다. 연암은 타고난 노마드였다. 과거시험을 포기한 뒤로 그는 평양과 묘향산, 속리산과 가야산, 금강산과 단양 등 명승지를 유람하며 세월을 보냈다. 늘 어디론가 떠나기를 염원하던 그에게 열하로의 연행은 느닷없이 찾아온 행운이었다. 하지만 6개월의 대장정에는 생사를 넘나드는 서스펜스 넘치는 어드벤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그가 이 길을 갈 때도 강행군이 이어졌었던 모양이다. 연암은 8월 8일 일기에서 “객점에 이르니 곧 밥을 내어 왔으나 심신이 피로하여 수저가 천근이나 되는 듯 무겁고, 혀는 백 근인 양 움직이기조차 거북하다”며 “상에 가득한 소채나 적구이가 모두 잠 아닌 것이 없을뿐더러 촛불마저 무지개처럼 뻗쳤고 광채가 사방으로 퍼지곤 한다.”고 적었으니 얼마나 힘든 행군인지 이해가 간다.

 지금 내가 그렇다. 힘든데다가 배탈이 자주 나서 이젠 주기적으로 설사를 한다. 어제저녁도 오늘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설사를 그렇게 하면서도 하루 42km 달리는 일에는 지장이 없으니 지금 내 몸이 참 신비하다. 넘어지면서 참 신비로운 내 몸에 경의를 표한다.     


 연암이 도착했을 때 열하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황제가 머무는 곳이 곧 천하의 중심지였으니 세계 각지에서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사신들이 몰려왔고 연암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짐승들이 즐비하였다. 연암이 여행자로서 커진 동공에는 사자가 들어왔고 타조가 들어왔다. 몸이 늘씬하고 발이 학같이 긴 러시아 개 등 신기한 동물들과 마주하고 선비의 입이 주책없이 벌어진다. 열하는 연암의 천신만고의 여정을 온갖 신비로운 것으로 보상해준다. 아마 평양이 내게 그럴 것이다.

 또 이 길이 몽골의 침략 이후 끌려갔던 수십만의 고려인들이 끌려갔던 길이었을 거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들 중 일부가 힘들게 살아서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 여자를 '환향녀'라고 했다. 조국은 살아서 돌아온 그녀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가족과 이웃들은 그녀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들은 '화냥년'이라고 부르고, 더러운 년으로 불렸다. 그녀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화냥년'은 고려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6.25 이후에도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다. 잔혹한 전쟁의 역사는 여자들을 지켜주지 못했고 조국은 그녀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본 위안부가 그랬고 미군 위안부가 그랬다. 그런데 넘어지는 그 화급한 순간에도 왜 미군 위안부 문제는 이슈화되지 않을까? 의문이 생겼다.

 미국은 모든 추악한 모습을 잠재우고도 남을 만큼 힘이 세서 그럴까? 미국은 과연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들고 시위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과 동급의 대우를 받는 것 같다. 아시럽의 거의 모든 나라를 지나온 인제 와서 사뭇 느끼지만 미국은 참으로 엄청난 힘을 가졌고 그 힘을 간교하게 사용하고 있다.       

   

 몸의 중심이 이제 거의 아래로 내려앉아 손바닥을 아스팔트에 대면서도 내 머리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치며 지나갔다. 절망감 사이에서도 피해를 최소로 줄이겠다는 필사의 노력이었다. 손바닥을 아스팔트에 대는 순간 손바닥은 까질 것이고 그렇다고 무릎이 아스팔트에 닿지 않게 막을 수도 없었다.

 손바닥이 아스팔트에 닿는 순간 손에 통증이 느껴졌고 바로 뒤이어 무릎이 바닥에 닿아서 또다시 통증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충격을 최소화하려 몸을 비틀어 한 바퀴 뒹굴었다. 그때 길가의 벽에 붙은 수많은 구호와 표어가 한눈에 들어왔다. 중국 어디를 가나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다 골라 담벼락이고 어디든 공간만 있으면 플랭카드를 붙인다.


 민주, 자유, 평화, 평등, 법치, 부강, 행복, 건강. 등, 수도 없는 공허한 단어들이 울림도 없이 눈에 피로감만 더하는데 표어 하나가 눈에 확 들어온다. 불망초심 뢰기사명(不忘初心 牢記使命), '초심을 잊지 말고 사명을 기억하자'는 뜻이다. 

 우리 군사정권이 내걸었던 ‘정의 사회 구현’이란 구호와 겹쳐지면서 저 아름다운 단어들이 먼저 내 기억의 생채기를 냈다. 억압적 이데올로기 하에서 작동하는 진실이 결여된 공적 언어의 어지러움이 더 하면서 나는 바닥에 내 몸이 내동댕이쳐지기 전 마지막 순간에 집중력을 발휘해 기적을 만들어, 아무 일 없다는 표정으로 일어날 절호의 기회마저도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넘어지는 내 모습은 분명 적벽에서 처절한 패배를 본 조조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대지에 오체투지를 하게 되었다. 노는 입으로 염불을 한다고 했다. 기왕 넘어져 오체가 땅에 닿은 김에 풀보다 더 낮은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무릎과 손바닥에 약간의 피는 흐르지만 지난번 넘어졌을 때보다 훨씬 잘 넘어졌다. 이 정도면 성공했다. 그러나 역시 바로 훌훌 털고 일어나기에는 통증이 있어서 한참을 바닥에 엎어져 있자니 옆에서 전병을 파는 사람이 다가와 뭐라고 말하면서 손을 내미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도 넘어져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손을 내미는 그 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제 먼지구름도 가시고 매연도 그사이 가셨다.


 나는 시장판 가운데서 많은 이들의 시선과 응원과 위로를 받으며 일어섰다. 그 짧은 순간 예전의 나는 넘어뜨리고 전병 장사의 밀가루 묻은 손을 잡고 새로운 내가 되어 일어서는 장엄한 의식을 치른다. 한없이 먼 세상에서 내가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난 분명 아시럽을 달리며 새로워졌다.     

 다가오는 재앙을 바라보면서도 어쩔 수 없을 때 인간은 한없이 나약함을 느낀다. 그 어느 때보다 긴 0.5초 사이 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자꾸 넘어지는 것이 기력도 떨어져서이겠지만 이제 거의 다 왔다는 안도감이 나의 긴장을 푸는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다. 마음의 평정심을 잃으면 쉽게 다치고 실수를 하게 된다.


 옛날 무인들은 마음에 요란함이 생기면 수련을 잠시 쉬었다고 한다. 이제 압록강이 바로 코앞인데 아직도 북한 입국허가를 받지 못해서 마음에 경계가 생긴다. 불망초심 뢰기사명(不忘初心 牢記使命), '초심을 잊지 말고 사명을 기억하자' 평화가 올 때까지! 이 말을 되내이며 마음을 다지며 최대한 멋지게 일어났다.     

 실패는 넘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시 못 일어나는 거란다.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했다.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지 않고 넘어지고 쓰러져도 기필코 다시 일어나는 것이 진정 값진 삶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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