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앞에 서서
(압록강 앞에 서서)
백두에서 피에 젖은 눈물 흐르니
두만이요 압록이로세.
두 줄기 눈물 한반도 감싸 안고
한라로 한라로 흐른다.
남몰래 띄워 보낸 애타는 사연들
땀에 절고 피에 물들어 흐르는 강 압록
내 젖은 마음도 강물에 뚝뚝 떨군다.
새가 되어 그대를 훌쩍 날아가고 싶지만
물고기가 되어 그대의
깊이 다 헤아리며 건너고 싶지만
아시럽을 달려온 지친 내 두 발 담가
마지막 남은 온기를 더한다.
보라! 푸른 안개를 헤치고
백두에서 시작하여 한라까지
달려가는 저 도도한 흐름을!
뜨거운 민족의 열망
찬란한 아침햇살로 솟아
환희의 물결로 퍼져 오르니
이 땅의 모든 강물이여
한라에서 뭉쳐 함께 우렁찬
새 평화의 시대를 노래하자!
한라에서 다시 백두로 대륙으로 박차고 나가자!
그대의 웅장한 나래가 펼쳐지는 곳에
만인은 서로 부둥켜안고 형제가 되리니!
발길이 압록강에 닿자 가슴이 강물처럼 일렁인다. 800km를 흘러온 강물도 이리 일렁이는데 1만 5천여km를 달려온 가슴이 어찌 수런수런 일렁임이 없을쏘냐? 감격의 눈물이 강물 되어 흐른다. 그동안 아시럽을 달리며 농축되어온 언어들이 금방 시가 된다. 시선은 단숨에 강을 넘고 그 너머 평야 지대를 지나 산을 넘어가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아직 입북허가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초조해진다.
오늘 역사적인 끊어진 압록강 철교를 향하여 달리는 길은 맑고 청명한 전형적인 가을날이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응원 온 평마사 상임대표 이장희교수와 김성곤 전의원을 비롯해 송인엽 교수, 원불교 최서윤교무를 비롯해 4명, 경기도청에서 14명의 응원단까지 약 30명이 함께 중국 공안이 긴장하지 않도록 조용하게 평화행진을 했다. KBS에서는 이 모든 장면을 꼼꼼하게 촬영했다.
압록강 하구를 따라 황금평 옆을 따라 달리려던 계획은 공안이 민감한 지역이라 극구 제동을 걸어 우회로를 선택하였다. 황금평에서 북과 중국은 개울 하나를 두고 국경이 갈라져 있다. 황금평의 원래 이름은 황금초이었는데 오래전 김일성이 벼가 누렇게 익을 때 찾아와 “황금평야구먼”이라고 말하면서 ‘황금평’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곳은 북한의 좋은 노동력에 중국의 자본과 기술을 결합해 황금평을 제2의 개성공단으로 개발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으나 안타깝게 무산되었다.
우리들의 발걸음은 공안을 자극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경쾌하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눈앞에 압록강이 펼쳐지자 감격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용솟음쳐 올라온다. 눌려왔던 환호성이 굳게 다문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온다. 민족의 비원을 안고 유장하게 흐르는 강이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반쪽의 조국이다. 바로 저기를 건너기 위하여 지난 1년여 나의 모든 것을 불태우며 달려왔다. 썰물이 빠져 나가서 더 가까이 보이는 강 저 건너에 황금빛 들판이 눈 안에 손을 뻗으면 잡힐 듯 들어온다.
갈매기도 이쪽저쪽 날아다니고 물고기도 이쪽저쪽 헤엄쳐 다닌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한쪽 발을 들고 기러기 떼 지어 날아가는 자세를 취하며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을 표한다. 안타까움 이라기보다는 간절한 기원을 올리는 동예, 무천, 영고와 같은 제천의식에 더 가까운 행위 같았다.
이곳에 함께한 모든 사람이 다 자유로이 가보고 싶은 고향 같은 땅이다. 압록강의 물빛이 오리 머리 빛과 같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고 하여 압록(鴨綠)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문인 강희맹은 “학 나는 들, 저문 산은 푸르러 눈썹 같고 압록강 가을 물은 쪽빛보다 더 진하네.”라고 노래하였다.
푸르러서 더 슬픈 강 압록을 따라 조금 더 가면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다리가 현대식으로 잘 지어졌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지어진 지 4년이 넘었지만 개통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리로 만들어져 다리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다리가 슬프게 한다. 조금 더 달려가면 6.25 때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압록강 철교가 더 나를 슬프게 한다. 그 끊어진 다리를, 남의 슬픔을 상품화한 30위엔의 입장료가 슬프다. 사회주의 나라의 자본주의보다 더한 상술이 통곡하도록 나를 슬프게 한다. 그곳에서 대여 받은 한복을 입고 웃고 사진 찍는 무심한 중국인들의 모습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 슬픈 끊어진 다리 위에서 마지막 인터뷰를 하자는 KBS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왜 아시럽 대륙을 달려 여기까지 뛰어왔느냐는 질문에 나는 할아버지 성묘를 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길이라는 것이 없던 길도 한 사람이 다니고 열 사람이 다니고 이어서 다니면 길이 난다. 나 같은 소시민의 성묫길이 열리고 그 길을 통해서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가고 신혼여행을 다니면 통일의 길이 될 것이라는 취지로 답을 했다.
그날 뉴스는 강명구 마라토너 방북무산으로 헤드라인이 나갔고, 내가 달리는 목적이 할아버지 성묘가 목적이었다고 나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를 응원해주던 많은 사람이 뉴스를 보고 분노하였다. 보는 관점에 따라 시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생각했다. 바로 입북허가가 나오지 않았다고 바로 ‘입북무산’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은 데스크도 무리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흥분할 것도 없었다. 조금 기다리다 그 입북허가를 받아 그 뉴스가 오보라는 것을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내 마라톤의 목적이 ‘할아버지 성묘’가 전부인가 아닌가 이었다. 짧은 시간 내에 압축 보도하는 뉴스의 특성상 그렇게 보도할 수도 있었다고 받아들였는데 많은 시민이 기레기 언론 운운하며 내 마라톤의 의미를 축소 보도했다고 흥분하였다. 심지어는 내게 “지금 강명구님이 북한 성묘를 위해서 달린 것 입니까?”라고 항의성 공개질의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우리 조국의 상황은 초인이 나타나 앞장서 평화와 통일을 장엄하게 외치며 73년간 분단된 고통의 상황을 일시에 해결해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 같은 소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달리는 것밖에 없었다. 겁이 많아 피 흘리며 독립운동은 못했을 내가 땀이라도 흘리며 통일을 노래했다.
그저 이 시대에 통일운동이 곧 독립운동이라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막의 태양이 살점을 녹여버릴 것 같은 더위에도, 산맥의 넘을 때 살을 에는 눈보라에도 달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달려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서 평화와 통일에 대한 무관심을 관심으로 돌려놓는 일,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던 내가 그것으로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되었다. 되돌아보니 판을 좀 크게 벌인 건 사실이다. 지구라는 거대한 탑을 돌면서 탑돌이 기운을 올렸으니 말이다. 이제 내 달리기가 국회 대정부질문에도 제기될 정도를 뜨거운 이슈가 된 것도 나로서는 대단한 일이다.
이제 내 달리기가 단순히 나만의 달리기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모든 강물의 물줄기는 자기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장엄한 물줄기로 변한다. 나의 성묫길이 그럴 것이다. 내 달리기에 많은 사람의 염원이 더해져서 장엄한 평화통일의 물결로 넘실대고 있는 것을 나는 이번 논쟁을 통해서 보고 있다.
나의 평화마라톤은 이미 나의 달리기를 넘어서서 많은 사람이 마음으로 함께 달리는 평화마라톤이 되었다. 그러니 내 마라톤이 어떤 이에게는 성묫길이요, 어떤 이에게는 새 삶을 개척하는 희망의 길이요, 또 어떤 이에게는 넓은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관문이요, 평화의 길이며 통일의 길이니 내게 이 평화마라톤의 의미가 무엇이든 큰 의미도 없어졌다. 각자의 마음에 통일을 꿈꾸는 그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굳이 내 입으로 내달리기가 목숨 내걸고 조국의 평화통일과 인류공영의 초석이 되고자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시작했노라고 떠벌리지 않아도 시냇물이 큰 물줄기를 찾아가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으니 내게 “지금 강명구님이 북한 성묘를 위해서 달린 것입니까?”라는 질문은 맞지 않는다.
이 길은 때로는 성묫길이요, 아버지와의 화해의 길이요, 나 자신을 찾아 나선 구도의 길이요, 세상 구경 한 번 멋지게 하는 여행길이요, 온갖 위험과 고통을 이겨내는 모험이며, 몸으로 표현하는 최대의 전위예술이며 최고의 유희이기도 하다.
아시럽의 경계를 다 넘어 그 넓은 세계를 품은 나를 편협한 사상이나 작은 언어의 경계 안에 가두려 하지 마라! 나는 이제 남과 북도, 좌도 우도 마음껏 넘나드는 자유인이다. 이제 우리도 그런 사람 하나쯤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안정적이고 강한 나라가 되었다.
끊어진 철교 앞에서 기차도 아닌 나의 달리기는 일단 멈추었다. 1만6천km 중의 1만5천여km를 달려왔지만 여기서 멈추면 나의 달리기는 절반의 성공밖에 아니다. 저 철교를 건너 신의주 찍고, 평양 찍고 판문점으로 넘어가야 완전한 성공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진인사대천명의 심정으로 이곳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여기저기서 좋은 신호들이 온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 항일운동 유적지와 우리 민족의 정기가 시작된 백두산 천지 등을 답사해야겠다.
뛰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몸을 길거리에 내달리게 함으로써 통일의 염원을 만방에 알리는 것이었다. 뛰는 것을 통해 나와 우리 모두의 소망을 한데 모아보자는 것이었다. 동아시아가 앞장서는 평화 시대를 활짝 열기 위해서 아시아적 세계관으로 세계를 직접 몸으로 경험해볼 필요가 있었다. 역사의 필연성과 희망의 간극을 좀 더 선명하게 보려면 맨몸의 부딪침이 소중하다. 진주 목걸이를 꿰고 지나가는 가는 실 가닥처럼 보석 같은 작은 평화의 마음을 꿰고 싶었다.
이제 마지막 구슬을 하나 더 꿰면 보석이 될 터인데 보석 하나가 뗑그르르 굴러서 그만 장롱 밑으로 들어간 형국이다. 그 구슬이야 어디 갔겠느냐 만은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