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사람들이 낮잠을 잔다고 게으르다는 것은 현지 날씨를 고려치 않은 오해이다. 사람들은 역동적이고 친절하며 띵감이 넘쳤다. 베트남의 아침은 이르다. 학교는 6시 45분이면 시작하고, 직장은 8시에 시작한다. 그 대신 점심시간은 2시간이다. 주 6일 근무하고 국경일도 많지 않다. 베트남의 고도성장은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자연은 깊고 풍요로웠고 들판은 산이 보이지 않을 만큼 끝없이 펼쳐졌고 농부들은 부지런하고 일터로 향하는 오토바이 행렬은 용의 움직임처럼 웅대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날씬 하지만 들판에 풀을 뜯는 소나 염소는 포동포동하다. 과거는 상처투성이지만 미래가 약속된 희망의 땅이다. 거리마다 용틀임 같은 힘찬 기운이 움터 올랐다.
어제 점심을 먹는데 옆자리에 앉은 젊은이가 인사를 한다. 자기는 한국에서 조선소에서 용접 일을 5년 동안 하다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갈 때 우리 점심값을 계산하고 나갔다. 아침 시간에 잠간 쉬러 간 곳에서는 젊은이가 부인과 어머니, 아이들, 여동생과 아침을 먹고 있더니 나보고 식사를 하면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식사를 하란다. 나는 배는 안 고프고 음료수만 한 잔 마시겠다니 아쉬워하며 그것이라도 계산한다고 한다.
조금 쉬고 일어나 달리자 곧 배가 고파서 쌀국수를 먹으러 들어갔다. 나는 급하게 먹고 조 목사님에게 “더 조금 쉬고 따라오세요.”하고 일어섰다. 조 목사님 전언에 따르면 음식값 10만 동이 나와서 계산하고 떠나려 하자 여비에 보태 쓰라며 30만 동을 주더란다. 이쯤 되면 우리의 평화달리기가 국제적인 민초들의 성원과 지원을 받아가면서 순항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평화의 바람아 조금만 더 세계 불어라!’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5년 베트남 공산당을 이끌던 호찌민이 북쪽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여 바딘 광장에서 독립선언을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역사의 전환은 그렇게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프랑스는 제국주의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일본 패망 이후 다시 인도차이나의 지배자로 들어오고 미국은 그 배후 역할을 했다.
1953년 11월 프랑스는 홍 강 삼각주 일대에서 라오스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려는 작전의 일환으로 디엔 비엔 푸에 기지를 설치하였다. 70년 전 베트남의 젊은이들은 ‘민족 혼’을 되살리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험준한 산속으로 몰려들었다. 아니 그것 하나만은 아니었을 게다. 프랑스군들이 마을을 불태우고, 여인들을 강간하고 재산을 약탈해 가는 본 끓어오르는 분노로 가득했으리라.
다시는 마약, 매춘, 알코올, 노예 노동과 학교보다 감옥이 더 많은 차별과 모멸로 점철된 야만적이고 혐오스러운 통치를 받지 않겠다는 결의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들의 투쟁은 처절하리만큼 강렬했다. 아무도 억지로 그들을 피 튀기는 전장에 내몰지 않았다. 그들의 병력은 전투가 계속되고 희생자가 늘수록 오히려 아메바의 분화처럼 분대에서 소대, 소대에서 중대, 중대에서 대대. 마침내 사단으로 병력이 오히려 늘어났다. 네이팜탄의 위험 속에서 전투병은 하루에 험준한 산악을 50km를 행군했고, 부녀자와 어린이들은 군수품을 날랐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은 베트남이 공격해 올 경우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을 박살 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붉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린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5만 명의 병력으로 2개월의 전투 끝에 1만6천여의 프랑스군 중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항복을 이끌어냈다. 프랑스군에게 치욕을 안기고 베트남은 독립을 이루어낸 환희의 순간이었다.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은 군사력으로 정치적 수완을 지닌 팜 반 동 수상과 함께 호찌민의 왼팔 오른팔 역할을 했다. 디엔 비엔 푸는 베트남 북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이지만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승리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는 기분 좋은 기억을 담고 있는 도시이다. 아시아 문명이 기독교 서구 문명을 물리친 최초의 승리였다. 비유럽 국가가 유럽의 현대화된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쳐 물리친 최초의 전투로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강한 일체감을 가지고 있는 2천4백만여 명의 민족을 프랑스의 무력으로 진압할 수 없었다.”
결국 프랑스는 디엔 비엔 푸 전투의 패배로 물러나며 제네바 협정을 맺게 된다. 베트남은 1954년 강대국들의 제네바 협정으로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제국주의자들에게 가장 유용한 식민지 통치 방법은 분할하고 쪼개서 통치하는 것이다. 힘의 결집을 막기 위해서이다. 지역을 나누기도 하고 계층을 나누기도 한다. 영향력 있는 집단에 사탕발림 식 권력을 나눠주고, 이권을 나눠준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기를 쓰고 충성을 한다. 이렇게 상호 불신과 분열이 조장하면 손도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다.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한 프랑스군은 10월 19일 하노이 통제권을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수도연대에 넘겨주고 도시를 떠났다. 프랑스 철수 이후 베트남 문제를 다룬 스위스 제네바 협약으로 북베트남의 베트남민주공화국 지위를 인정하고 북위 17 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분리하되, 2년 안에 남북 총선거를 해 베트남 민중이 선택한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북쪽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입각한 호찌민의 북베트남이, 남쪽에는 공산주의 세력의 남하를 염려하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베트남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제 호찌민의 목표는 독립이 아니라 통일 쪽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열강으로부터 진정으로 독립하는 것이었다.
골치가 지끈지끈 해진 건 미국이었다. 당시 소련과 이념대결이 한참인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패권 유지를 위해서는 독재정권도 지지하는 미국이었지만, 제네바 협정에 의해서 2년 내 총선으로 통일을 약속한 규정을 따를 수가 없었다. 남베트남에서 투표를 통하여 호찌민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처음 프랑스의 지원에 의해 국가주석이 되었던 마지막 왕조 응우엔의 바오 다이 황제를 밀었다. 그러나 그의 방탕한 생활로 민심이 이반하여 미국이 바오 다이 대신 괴뢰 정권 수장으로 내세운 이가 바로 응오딘 지엠이었다. 그는 한때 프랑스 식민통치에 반대하여 독립운동가로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초대 대통령이 된 응오딘 지엠은 부패한 군벌을 일소하고 경제성장을 이끄는 등 업적도 있었으나 초심을 잃어버리고 토지개혁을 거부하고, 대다수가 불교 신자인 베트남에서 가톨릭 우대 정책을 펼치며 족벌 정치 등 무능하고 타락한 독재자가 되면서 스스로 정치적 무덤을 팠다. 지엠 정권은 특히 농촌에서 민심을 빠르게 상실했다. 1960년 남베트남에서 응오딘 지엠의 독제에 맞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자생적으로 결성되었다. 일명 베트콩이다.
1963년 11월 1일 사이공에는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응오딘 지엠은 압송 도중 사살되면서 파란 많은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 후 수차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고 사실상 남베트남은 미국에 의해 간신히 명맥이 유지되는 수준이었다.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에 모든 것을 맡기고 바라보고 있을 수만 없는 처지에 빠지자 개입의 명분을 찾던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일으켜 지상군을 파견하게 된다. 베트남을 지옥으로 몰고 가는 서곡이 소름끼치도록 으스스하게 울려퍼졌다.
1964년 8월 2일 휴가를 즐기던 미국인들은 호외를 집어 든다. 베트남 통킹만 해상에서 정찰 중이던 미국의 구축함 매덕스가 북베트남의 어뢰정 공격을 받았다는 기사였다. 그리고 불과 2일 뒤인 8월 4일 구축함 조이터너 함 역시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두 번째 공격에 관한 전문을 받고 존슨 대통령은 즉각 전면적인 보복 공격을 지시했다.
1971년 뉴욕타임스는 미 국방성의 비밀보고서를 입수해 통킹만 사건의 조작을 최초로 폭로했다. 즉 첫 번째 매덕스 호 어뢰 공격은 존재했으나, 미국의 참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두 번째 공격은 없었다는 것이 밝혀진 사실이었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도 일부 시인했다.
1965년 말 18만 4천여 명의 미군이 베트남에 들어온 것이다. 이듬해 한 해 만에 미군은 그 두 배인 32만 명으로 증강한다. 1968년에는 그 수 자가 54만에 이르게 된다. 미국의 전쟁 명분은 ‘자유, 민주주의, 자결권’이었지만 공산주의의 남하는 미국의 세계 패권과 냉전에서의 승리를 위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그냥 바라만 볼 수 없었다.
미국은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가 자국민을 대규모 무차별 학살한 이른바 ‘킬링필드’의 만행을 자행하도록 방치하기도 했다. 2010년 위키리스크의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가 폭로한 문서에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중동에서 미국은 민주주의보다는 독재정권과 결탁하면서 자국의 이익과 패권의 극대화를 우선했다. 미국이 패권이 유지되는 동안 세계인은 고통을 받았다. 특히 남미의 가난과 고통을 생각해 보라! 그러니 차라리 “American First”를 공개적으로 부르짖는 트럼프는 차라리 솔직한 정치인인 셈이다.
구소련, 중국, 북한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의 확산은 일본, 남한, 대만, 남베트남으로 이어지는 방위선을 위협할 것이 뻔했다. 만약 남베트남이 공산화가 된다면 인도차이나 전체가 공산화가 되 것이 불을 보듯 훤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남베트남 정권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주재하는 군사요원을 61년 3천 명 수준에서 63년 1만 6천여 명으로 늘리고 남베트남 병력은 24만여 명에서 무려 51만 명으로 증강시킨다.
포연이 사라진 후, 미국은 자신들의 인명피해를 정확히 계산했다. 5만 8천여 명 사망, 3십만 5천여 명 부상. 그런데 그에 맞서 싸우던 베트남은 사상자 규모를 정확히 계산할 수 없었다. 단지 3백 5십만에서 4백만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사망자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당시 베트남 인구는 4천 5백만이었다.
왜 미국이 원치 않는 더러운 전쟁에 깊숙이 개입하게 됐는지는 1971년 뉴욕타임스가 폭로한 펜타곤 기밀서류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에서는 “베트남전쟁은 미국 정부, 미국의 방위산업체, 그리고 광신적 반공주의자들이 결탁한 침략 전쟁이었다.”라고 폭로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에게 이 전쟁은 자주독립을 쟁취하여 평화롭게 살아갈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성전이었다.
반공 성전, 더러운 전쟁, 항미 전쟁으로 각각 다르게 불리는 베트남 전쟁. 과연 무엇을 위한 전쟁, 무엇이 진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