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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온 Mar 19. 2024

옥택연과 양자경과 유태오의 상관관계

<패스트 라이브즈>가 시작한 지 5분도 안 돼서 난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확신했다.

영화사 A24 도장이라도 찍힌 듯한 영상미와 끝내주는 영화 음악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이후 전개가 나의 이해 가능 범위 바깥으로 흐르면서 초반의 확신이 점차 흐려지는 경험을 했다. 뭐랄까 좋은 영화인 건 알겠는데 나를 위한 영화는 아니라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모든 좋은 영화 다 나를 위한 거면 좋겠어)


무엇보다 노라의 남편 아서가 신경 쓰여서 노라와 해성의 관계에 집중을 못하겠더라. 이를테면 나는 노라의 남편과 노라, 해성이 함께 바에 갔는데 노라와 해성만 한국어로 대화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게 비단 남편과 첫사랑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누구든 그런 식으로 소외되는 게 싫다. 아서의 표정 속에 내가 있고, 내가 놓친 사람들이 있어서 괴로웠다.


한국말 못 하는 남편을 바로 옆에 두고 휘성처럼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를 불러 재끼는 상황을 내 머리론 이해 못 하겠다고..



그러나 공교롭게도 팔짱 끼고 보던 이 바 장면 끝에서 나는 다시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됐다. 정확히는 이 장면 속 한 대사가 마음에 콕 박혔고 지금까지 곱씹고 있다. 씹고 씹다가 이 글까지 쓰게 된 거다.


해성은 '만약 그때 ~ 했다면'이라면서 계속해서 과거를 가정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이 되었을까?라고 반추하고 후회하고 뒤돌아본다. 만약 그때 네가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때 우리가 연락을 끊지 않았다면 부부가 됐을까? 아이들을 가졌을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가정과 후회 속에서 해성은 마침내 깨닫는다.


"근데 이번에 와서 확인한 사실은 넌 너이기 때문에 떠나가야 했어. 그리고 내가 널 좋아한 이유는 너가 너이기 때문이야."


수많은 'IF'가 무용해지는 순간. 아니 무용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현재를 긍정하면 과거의 어떤 선택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어떤 선택도 바꾸고 싶지 않아 진다. 사실 이것은 오늘날의 나를 성립시키는 큰 가치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글은 패스트 라이브즈가 아닌 그 가치관에 대한 글이다.




나는 타고나기를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어릴 때는 수도 없이 많은 후회를 하고 '만약'을 생각하느라 현재와 미래를 잘 못 보는 사람이었다. 이런 나의 후진밖에 모르는 에잇톤 트럭을 막아준 몇 개의 미디어들이 있다. 나에게 영향을 준 순간들은 희한하게 기억 속에 사진처럼 선명히 남아있다.


첫 번째는 드림하이다. 웃지 마세요ㅋㅋ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초등학생 때 열시청하던 드라마 <드림하이>의 한 에피소드에서 삼동이가 자기 때문에 다쳤다면서 "내가 그때~하지 않았다면, 아니 내가 원한을 사지 않았다면, 아니 내가 차라리 이 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다면 삼동이가 다치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 패닉이 온 수지에게 옥택연은 이렇게 위로해 준다. "그렇게 따지면 우린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해."  


별 거 없는 대사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충격을 받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렇구나!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하고 가정하는 것은 정말 아무 의미가 없구나! 하고. 신기하게 그 이후로 수지처럼 과거를 후회하며 울부짖을 때마다 이 대사가 떠오르면서 후진을 멈추게 됐다.


드림하이의 대사에서 내가 정확히 뭘 깨달았던 건지, 그 진실이 무엇인지는 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영화를 만나며 알게 됐다.



에에올은 선택에 관한 영화다. 애초에 세계관부터 '선택'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모든 경우의 수가 또 다른 멀티버스가 된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경험하고도, 모든 것이 모든 곳에서 한꺼번에 될 수 있대도, 결국에는 현재를 긍정한다. 설령 그게 최악 버전의 나라도 해도 상관없다고.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면 된다고.


'지금의 나는 내가 해온 선택의 총체'라는 걸 이 영화를 통해 배웠다. 만약 과거의 어느 순간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거다. 하나의 결과에는 하나의 원인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현재 나의 한 부분이라도 긍정한다면 과거의 어떤 선택도 바꾸고 싶지 않아 진다. 그게 후회되는 선택이라고 해도. 바꾸고 싶은 과거라고 해도.


이걸 깨닫고 나니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과거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에 오랜 시간을 쏟지 않게 됐다. 앞서 말했듯 나는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과거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과거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버스점프를 해서 현재로 돌아올 수는 있다. 옥택연과 양자경 덕분에 (.........)



그래서 패스트 라이브즈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라면.. 나를 위한 영화는 아니라는 말을 번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드림하이와 에에올을 통해 나를 긍정하는 법을 깨달았다면, 패스트 라이브즈를 통해서는 너를 긍정하는 법을 배웠다. 나에게만 적용해 왔던 '현재를 긍정하면 모든 과거 긍정 가능' 법칙을 타인에게도 적용할  있을  같다.


나는 너가 너라서 좋기 때문에 너가 너라서 했던 선택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고. 그걸 부정하면서 상상하는 '만약에' 정말이지 아무 의미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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