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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샘 Apr 09. 2019

우리 집 가장은 남편이 아니다

우리 집에서 가장을 없앤 이유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신혼집에서 맞는 서 너번의 주말 중 하루였다.

앞으로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편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사실 나는 이제 결혼한 어른으로서의 책임감도 조금씩 느껴져. 가장으로서 우리 가정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고, 양가 부모님께 먼저 나서서 잘해야 된다는 의무감도 있고."    


남편의 이야기를 듣다가 깜짝 놀란 나는 반문했다.     


"자기가 왜 가장이야? 나도 돈 버는데? 우리 버는 수입도 같잖아. 게다가 나로 인해 들어오는 부수적인 재테크 수입까지 합치면 내가 더 많이 벌 때도 있고. 어찌 보면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를 부양하는 처지인데 왜 자기만 우리 집의 리더지?"    


남편 역시 내 이야기를 들을수록 동공이 커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도 놀란 것이다.

이 날 우리는 '가장(家長)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긴 시간 토론했다.     


남편은 그 집안의 가장 나이 많은 남자가 가장이라고 여기고 살았고, 나는 그 집안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가장이라고 여겼다. 나의 논리는 그동안 사회적으로 여성에 비해 남성이 경제 활동을 하는 수가 월등히 많았고 그래서 집안에서 경제권을 담당하는 것은 남성이었기 때문에 대다수 남성들이 가장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었다.


이젠 여성들도 활발히 경제활동을 하고, 힘이 아닌 머리를 쓰는 지식산업 시대에서는 여성이 돈을 더 잘 버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데 오직 남성만 가장이라는 생각은 바뀌어야 되지 않을까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결국 남편도 나의 논리에 수긍하였고 '그럼 우리 집 가장은 나보다 돈을 좋아하고 잘 불리는 꽃샘이 네가 하면 되겠네!.' 말했다. 딱히 장(長)의 권위를 탐내고 시작한 토론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인정해준다니 나도 '그래, 이 집의 짱은 바로 나야.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야 돼~'라고 장난스레 으스대면서 대화를 끝낸 적이 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이 대화를 다시금 곱씹을 수 있게 된 건 남편 덕분이다. 둘이 퇴근하고 와인 바에서 얼큰하게 술이 취한 날이었다. 남편은 그 날의 대화가 인생에서 손꼽을 수 있는 신선한 충격이었노라고 고백했다. 여태까지 배워온 남성으로서의 역할, 이미 결혼 전부터 느꼈던 가장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말이었다고.    


그러지 않아도 남편은 고지식하고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다. 그에 더해 '가장'이라는 까지 지게 되었으니 그 부담감이 가볍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시기에 내가 '그건 당신 역할이 아니야'라고 말해준 게 무척 파격적이면서도 내심 반가웠단다. 그 후론 한 번도 본인을 우리 집 가장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고백을 했다.     


하지만 나 역시 전통적인 내 역할을 남편에게 떠넘긴 것이 있다. 바로 살림. 나는 살림을 못한다. 혼자 살 땐 '무질서도 질서'라는 궤변으로 정리정돈을 미뤘고 설거지는 다음 끼니를 그릇에 담기 위해 하던 것이었다. 그나마 요리는 엄마의 레시피를 전수받아 간간히 먹고사나 새로운 메뉴를 개발할 의욕은 없다.     


반면 남편은 수건부터 각 맞춰 접고 수시로 집 안을 쓸고 닦는다.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무선 청소기를 요구했고 유튜브 쿡방을 틀어놓고 주방에서 요리를 한다. '집이 무척 깨끗하다'는 칭찬에서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내 남편이다.     


나는 살림하는 재주는 없지만 재테크를 좋아한다. 부동산 시장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어떤 식으로 돈을 벌 수 있을지를 항상 생각한다. 여기에서 얻는 소소한 수익이 내 삶의 희열이며 만족이다. 남편은 월급 이외의 돈벌이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리고 나는 트렌드에 민감한 성향이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한 번도 안 가본 곳, 보지 못한 것, 먹지 않아 본 음식을 찾아 주말이나 휴가를 보낼 계획은 짜는 건 항상 나다. 계획을 짜고 새로운 정보를 알아보는    남편은 내가 짠 계획에 맞춰 따라다니는 걸 좋아한다.   


서열도 권한도 없는 우리집엔 평화가 꽃처럼 핀다.                                이미지 출처 phanphan.illustrator@gmail.com

  

만일 우리가 전통적인 역할에 매몰되어 남편은 내게 깔끔한 살림 능력을 요구하고, 나는 남편에게 모든 의사결정 권한을 넘기거나 돈에 관심 좀 갖기를 기대한다면 둘이 사는 게 무척 괴롭지 않았을까?    


우리는 서로 잘할 수 있는 일을 인정해주기로 했다. 이 말인 즉 관습적인 틀에 갇혀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가장이라는 역할에 남편을 가두지 않았고 그 가장을 보조하거나 따르는 역할에 나를 가두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집엔 가장도 없고 내조라는 개념도 없다. 아무렴 어떠하리. 오늘도 우리 집은 깨끗하고 편안하며 평화롭다.     




 출처

작가 이름: Phan Phan

메일 주소: phanphan.illustrator@gmail.com

인스타그램: @phan.p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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