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국의 짧은 여행기
아를,
남프랑스의 작은 소도시이다.
어쩌면 반 고흐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내가 이곳에 발을 디딜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태양은 샛노란 집들을 밝혔고 고흐의 창작욕을 최고로 불태웠다.
<해바라기>,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등, 고흐의 걸작이 탄생한 이곳.
그리고 나는, 2021년 10월 24일, 그곳에 발을 디뎠다.
프랑스의 제2도시 마르세유에서 40분을 달려야 나타나는 곳, 아를.
아를 역에 내려 바닥을 잘 관찰해본다면 고흐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는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아를 원형 경기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고흐는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기원전 로마 제국의 유산은 이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함성을 담았을까.
그러나 21세기의 일요일은 그저 적막만이 가득하다.
시간이 하나의 실타래라면, 아를은 그 중 19세기의 한 부분을 잘라내어 그대로 진공 유리관에 넣어 전시한 박물관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박제된 이곳에는 20유로를 받고 19세기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가가 있다.
움직이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는 작가님은 하나 둘 셋! 에 익숙하게 작은 뚜껑을 열고 사진을 찍는다.
서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다 보니 원리를 묻기도, 이해하기도 참 어렵다.
현상을 하고 물에 담구어 말리는 20분이 지나고 사진을 찾으러 가면, 꽤나 구한말 역사책에 실려야 할 것 같은 사진이 나온다.
울퉁불퉁한 테두리와 고르지 못한 표면과 색감.
이미 여러 도시들을 여행했고 여행하고 있지만, 이 사진만큼 울림이 있는 기념품이 있을까.
일요일이라 문을 닫은 상점의 야외 좌석 틈새에서 반 고흐는 쓸쓸하게 카페를 바라보고 있다.
동상의 시선의 끝을 따라가면 <밤의 테라스>의 배경이 된 반 고흐 카페가 있다.
이 위치보다 세 걸음만 더 왼쪽으로 가서 쪼그려 앉으면, 고흐가 그렸던 그 모습을 그대로 담을 수 있다.
일요일 4시, 카페가 있는 작은 광장은 정적뿐이다.
혼자 여행하며 내뱉어 말할 상대 없는 나의 생각들은 안으로, 안으로 향한다.
당장 굶더라도 음식 대신 물감을 먼저 살 정도로 몰두하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런데 그렇게 애정을 담은 그림이 평생 단 한 점만 팔렸다면?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던 질문은 이내 더 안으로, 나를 향한다.
나는 그 정도로 무언가에 몰두할 수 있을까, 그 정도의 에너지가 나에게 있나, 내가 죽은 후에 빛을 볼 수 있는 성취를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뭔진 몰라도 교과서에 남을 정도로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초등학생 때의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작아만 졌다.
‘언젠간 이걸 직업 삼아 유명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조금 일찍 시작된 열한 살의 사춘기부터, 공부도 했지만 그림도 그리고 악기도 연주하고 캘리그라피도 해보고 글로 쓰고 싶은 이야기도 생각해봤다.
4년쯤 걸린 사춘기가 지나자 죽은 나무의 가지가 툭 치면 힘없이 떨어지듯 그 꿈들은 하나 둘 우수수 떨어졌다.
내 안에서 해보고 싶던 게 너무도 많던 그 시기, 시종일관 길을 잡아준 어른들은 선생님들이었다.
마음껏 놀게 내버려두면서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초등학교 4학년 선생님, 삶의 반면교사가 되어준 5학년 선생님, 오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진 나만의 엄마지만 오전엔 초등학교 5학년 30명의 엄마가 되어야만 했던 엄마까지.
앙상해진 꿈의 나무에서 모방과 동경의 불씨는 그쪽으로 옮겨붙어 그때부터 ‘교사’ 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모든 아이들을 나름의 방향으로 바르게 키우는 교사라는 원대한 포부는, 어쩐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러는 제도에, 더러는 인식에, 더러는 그 외의 수많은 현실들에 막혀 자꾸만 자꾸만 작아진다. 교생실습을 나가면 나갈수록, 알면 알수록 두려워진다.
두 번의 실습과 베이비시터와 과외를 통해 만난 수십 명의 아이들 끝에, 큰 틀을 잃어버린 채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로 표류하는 마음으로는 4년의 학교 생활을 내내 버틸 자신이 없었다.
3학년의 나는 도망치듯 이탈리아로 교환학생을 떠나 옆 동네인 이곳 프랑스에 왔다.
오늘의 나에겐 고흐만큼 열정을 쏟을 어떤 대상도, 자신감도, 포부도 없다.
가만히 생각하다보니 어느덧 해가 진다.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이 그려진 그곳을 찾아간다.
한적한 도시에서는 조용한 낮만큼이나 밤도 고요하다.
오후 8시, 내가 가본 그 어느 도시보다도 일찍 꺼지는 가로등을 하나 둘 바라본다.
별이 총총하다.
인공광이 사라지자 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별 지도 어플로 별자리를 하나하나 찾아보고, 핸드폰을 내려놓고도 별들을 이어 아까 그 별자리를 다시 생각해보려고 애써본다.
나중에는 별을 보기 위해 아무도 오지 않는 론 강변 산책로에 아예 벌렁 누워버렸다.
하늘을 꽉 채운 별은 핸드폰 카메라 따위로 담을 수 없다.
인공광에서 도망쳐야 별들이 보이는 것처럼, 나는 지금 내가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사회에서 잠시 도망쳤다.
내가 쫓던 별들의 위치가 그제야 보인다. 아주 멀지만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쩐지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꾸는 꿈이, 별에 닿겠다는 마음은 아직은 허황되지만 별의 방향을 쫓아 걷는 것은 할 수 있다.
내가 ‘한국의 페스탈로치’가 되지 못하더라도 그런 태도로 노력하다보면 적어도, 내가 겪을 수십 수백 명의 아이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나를 ‘인생 교사’로 꼽을지도 모른다.
론 강은 어디에 내세울 만한 취미나 장기가 없다는 나의 우울함을 흘려보낸다.
그곳 강둑에 누워야 보이는 저 멀리 총총이는 별과 강 건너에서 반짝이는 찻길의 가로등은 ‘어쩌면 내 남은 삶이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작은 희망을 심어준다.
그렇게, 조금은 후련해진 상태로 이 도시를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면서 가까운 남프랑스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했지만 이토록 급격하게 감정이 변화한 것은 아를의 밤하늘 때문인지, 이곳을 살다 간 고흐의 발자취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아름다운 론 강의 별을 추억하며 21시 43분, 아를을 떠나는 기차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