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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젬마 Feb 17. 2021

나는 이 동네가 더워서 좋았다.

    나는 이 동네가 더워서 좋았다. 더운 건 얼음 하나 물고 에어컨을 켜면 되는데 추우면 뱃속부터 덜덜 떨리고 자꾸만 사람이 불쌍해진다. 칼바람을 뚫고 출근해서 자리마다 히터 하나씩은 발 밑에 두어야 일이 되는 서울의 겨울과 겨울마다 눈이 무릎까지 와서 집집마다 삽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강원도의 겨울을 겪다가 이 동네에 오니 살 것 같았다. 여름은 서울만큼 덥고 겨울은 서울보다 안 춥다. 뭐 하나라도 나으니까 이득이 아닌가. 


    비가 많이 온 다음 날이나 아주 이른 아침이 아니면 한겨울에도 패딩을 입을 날들이 많지는 않다. 재작년 크리스마스에 한국에서 친구가 놀러 올 때에도 내가 누누이 얘기했다. 무거우니까 두꺼운 겨울옷 가져오지 말라고. 혹시나 추워지면 남는 패딩 빌려준다고. 12월에도 늦봄 같은 날씨에 얇은 봄 재킷 하나씩만 걸치고 식물원에서 산뜻하게 사진을 찍던 때도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는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국제학생들의 상당수가 그래서 눈을 그리워한다. 앨라배마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 중에는 눈 오는 날에 로망이 있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눈 오는 소리에 낭만보다는 지하철 연착을 먼저 떠올리는 1호선 통근러 출신의 나조차도 한 3년쯤 눈이 안 오니까 조금 그리워졌다.


    눈이 온다는 소리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 년에 한두 번 꼴로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예보가 있었다. 앨라배마의 눈 예보가 설레는 이유는 비단 낭만 때문은 아니다. 눈 구경하기가 워낙 힘든 곳이다 보니 제설 설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조금만 눈이 내려도 회사며 학교며 전부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예보를 처음 듣던 겨울에 나는 강의실에 있었는데, 미국 학우들이 다 함께 술렁술렁이는 것이 해리포터의 초반 장면 같았다. "그거 들었어? 해리 포터가 살아남았대!" 하고 수군수군대는 마법사들 사이에 도대체 이게 무슨 뉴스인가 고민하는 한 명의 머글이 된 기분이었다. 강의를 마치며 교수님이 말했다.


    "우리 모두 좋은 소식을 빌어봅시다!"


    그러나 눈은 오지 않았다.


    작년에도 이런 예보는 있었다. 학교에서 문자로 날씨 경보를 받았고 성실맨이 퇴근길에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건 날이었다.


    "내일 눈이 올지도 모른다고, 출근 여부는 아침에 날씨 보고 알려준대!"


    성실맨은 너무 들뜨니까 오히려 조금 우울해졌다. 이미 마음은 출근을 못하게 됐는데 혹시나 눈이 안 와서 출근을 해야 하면 두 배로 억울하고 피곤할까 봐 계속 울상이었다. 밥을 먹다가도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테레비를 보다가도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잘 자리에 누워서도 계속 나한테 물었다.


    "이랬는데 내일 눈 안 오면 어떡하지...? 죽고 싶을 것 같은데..."


    그는 이튿날 죽고 싶은 절망감을 이기고 출근을 했다. 눈은커녕 비도 안 왔다. 날은 푹했다.


    이런 일이 몇 번 있고 나니 나는 이 지역의 눈 예보를 전혀 믿지 않게 되었다. 일요일부터 하루 종일 학교에서 문자와 이메일이 날아왔다. 제대로 읽지도 않았는데 뭐 아무튼 날씨가 안 좋아서 캠퍼스를 닫네 마네 하는 내용이었다. 월요일 아침에 하는 스페인어 수업 선생님한테도 문자가 왔다. 아침에 보고 혹시 운전을 못하겠거든 연락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학교도 문을 연다고 하고 비도 안 오길래 그냥 무시하고 수업에 갔다. 하지만 수업이 끝날 무렵 비가 쏟아져서 돌아올 때는 살금살금 운전해야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이사 가기로 한 아파트 사무실에서도 전화가 왔다. 길이 얼 수도 있어서 내일 사무실 문을 닫을지도 모르니까 필요한 서류가 있으면 오늘 얘기하라는 전화였다. 그리곤 성실맨한테 전화가 왔다. 조기퇴근을 한단다. 더 늦으면 길이 얼어서 못 온단다. 그리고 내일 출근을 못할지도 모른단다. 혹시 집에 고립될 수도 있으니까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퇴근길에 사 오게 말해달란다. 비가 오고 영하로 떨어져서 도로가 어는 것이 결근의 이유가 된다면 나는 서울에서 몇 번이나 일을 쉴 수 있었을까 의미 없는 상상을 잠깐 했다.


    어제 잘 자리에 성실맨은 기도를 했다.


    "내일 꼭 눈이 오게 해 주세요... 눈이 와서 집에서 쉬게 해 주세요..."


    고립된다고 해서 할 일을 안 할 수는 없고, 식구가 늘어봐야 시끄러울 뿐인 나란 재택러도 소원을 빌었다.


    "내일 따뜻하게 해 주세요... 좀 미안하지만 성실맨 출근하게 해 주세요... 조기퇴근까진 양보하겠습니다..."


    잠자리가 어쩐지 춥더라니, 오늘 아침 7시 반에 성실맨이 방문을 열면서 소리 질렀다.


    "지수야, 눈 와!"


    드디어 염원을 이룬 자의 목소리다. 결근하게 된 근로자의 목소리다.

    


    슈가는 눈이 오든지 말든지 별 관심이 없고 콜라는 창 밖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막상 눈이 온다니까 신이 나서 집 앞에 잠깐 구경을 하러 나간다니 성실맨이 잠옷 차림으로 나가면 얼어 죽는단다. 나가보니 맨다리로 나오기에 춥긴 추운데 기대에는 못 미치는 추위다.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한국에 있는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눈 온다고 자랑을 했다. 아침부터 뜨끈한 게 필요해서 미역국을 끓여 먹으면서 같이 잠깐 테레비를 봤다. 일요일 같다.


@7isu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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