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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젬마 Feb 18. 2021

그때는 쌀국수의 소중함을 몰랐지.

    그때는 쌀국수의 소중함을 몰랐지. 회의실 건물 아래에서 물리도록 먹을 때는 말이다. 일요일마다 있던 회의는 회사 건물이 아니라 다른 동네에 있는 외부 회의실에서 진행되었다. 저자 회의라는 것이 오전 8시 반에 모닝커피로 시작해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하고 11시쯤 막차를 타고 집에 간다는 소리인 줄을 입사 둘째 주에나 알았다. 첫 주에는 신입이라고 일요 회의를 면제해주었기 때문이다.


    회사가 밀집된 업무중심지도 아니고 주택단지에 더 가까운 곳에서 하루에 두 끼나 해결하려니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았다. 팀원들끼리면 간단하게 때워도 괜찮았을 텐데 일주일에 한 번 저자들을 모시는 자리라 좀 그럴듯한 걸 먹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잘 안나는 프랜차이즈 베트남 쌀국수 식당은 그중에서 가장 만만한 선택지였다. 각자 먹을 식사와 나눠먹을 요리를 서너 개 시켜 늘어놓고 나면 일고여덟 명이 깔끔하게 먹기에 괜찮았다. 기름지지 않아서 장시간 앉아있어도 소화에 부담이 없었고 뜨끈한 국수는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나잇대의 회의 참가자들이 적당히 만족할만한 음식이었다.


    그걸 매주 먹으면 질린다.


    베트남 쌀국수는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축에 속한다. 그러나 일 순위는 아니다. 친구가 먹으러 가자고 하면 냉큼 따라나설 만큼은 좋아하지만 너무 먹고 싶어서 끙끙 앓아본 적은 없는 음식이라는 얘기다. 누가 먼저 제안하지 않는 한 메뉴 선정에 있어 얼른 생각나는 음식은 아니다. 괜찮은 해산물이라곤 없는 이 척박한 곳에서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스시를 먹는 동안에 쌀국수라고는 호기심에 사본 인스턴트를 끓여먹은 것과 친구가 집에서 끓여준 걸 먹은 게 전부다. 물론 친구의 쌀국수는 맛있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지는 수다가 훨씬 재밌었으므로 그냥 그게 쌀국수라는 데에 크게 중점을 두지 않았던 것뿐이다.


    밸런타인데이 점심 메뉴도 그래서 쌀국수는 아니고 스시였다. 나한테 만회할 것이 조금 있는 성실맨이 며칠간 나름대로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하더니 괜찮은 식당을 몇 개 알아놨다고 했다. 그러나 하필 밸런타인데이 당일에 나는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았다. 그리고 성실맨이 알아놨다는 식당은 문을 안 열었다. 2순위의 식당도 전화를 안 받았다. 약간의 멀미를 느끼면서 차 안에서 오동동동 실려 가다가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그냥 아무 데나 가자..."


    약간의 위기의식을 느낀 성실맨이 긴급히 찾은 곳 또한 쌀국수집은 아니었다. 그냥 근처의 또 다른 스시집이었다. 구글맵에 평이 좋다고 했다. 점점 몸이 안 좋아지는 나는 차에 있고 성실맨이 스시를 포장해왔다. 원래는 괜찮은 공원에라도 가서 먹을 작정이었는데 그냥 아무데서나 빨리 먹고 집에 가서 눕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아서 한적한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허겁지겁 포장을 깠다. 근데 맛이 없다. 밥은 퍽퍽하고 생선은 비리다. 멋들어진 아보카도를 좀 올렸을 뿐이다.


    "어, 이상하다... 리뷰가 되게 좋았는데..."

    "혹시... 리뷰 쓴 사람들 다 미국인이야...?

    "음..."

    "혹시... 식당 안에 다 미국인이야...?

    "어..."

    "혹시... 여기 사장 미국인이야...?"

    "그건 잘... 근데 어쩌면..."


    낮잠을 자고 다시 나온 건 늦은 오후였다. 몸보다는 마음이 안 좋아서 누웠던 건데 이대로 저녁이 되면 나의 상태가 손쓸 수 없어질 것을 직감한 성실맨이 좋은 반려자답게 애교로 나를 끌고 나왔다. 그러지 말고 예쁜 걸 보고 맛있는 걸 먹자고. 걱정은 평일에 마저 하자고.


    충동구매를 좀 하고 드라이브도 좀 하다가 날이 춥길래 보이는 식당 중에 동양 음식인 걸 찾아 들어갔는데 그게 쌀국수집이었던 것뿐이다. 음식을 시키고 앉아있는데 낯익은 사람이 들어와서 보니 학교에서 아는 베트남 사람이서 신뢰도가 약간 올라갔던 것뿐이다. 일단 음식 냄새를 맡으니까 눈이 돌아갔던 것뿐이고, 숙주와 고수와 육수가 하나 되어 입 안에서 댄스를 추었을 뿐이고, 후끈한 국물에 얼굴이 벌게지니까 "그래, 이게 밥이지!" 같은 추임새가 절로 나왔을 뿐이다. 친절한 건지 불친절한 건지 모르겠는 서버와, 무슨 일인지 수박을 썰어서 오븐에 넣고 있는 베트남 사람이 나오는 테레비와, 진하고 짜릿한 고수 냄새가 왠지 여행지 같았다. 양껏 먹고 콜라를 계속 리필해서 마셨다. 돌아오는 차에서 우리는 그동안 왜 쌀국수를 먹을 생각을 못했던 것이며 숙주와 고수와 고기의 조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국물은 또 얼마나 절묘하게 향기로운지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맨날맨날 쌀국수를 먹고 싶다고도 했다.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아예 베트남으로 여행을 가자고도 했다.


    눈을 뜨면 서로 번갈아서 "그 쌀국수 또 먹고 싶다"를 아침인사 대신 건네던 중에 친구들하고 점심 약속이 생겼다. 나 포함 한국인 둘, 미국인 둘인 모임이다. 뭘 먹고 싶냐길래 물었다.


    "Do y'all like Pho...?"


    식당 대신 미국인 친구네 집에서 식사하기로 이야기되면서 각자 점심을 픽업해서 모이기로 했다. 그때부터 살짝 걱정이 되긴 했다. 얘네 분명히 샌드위치나 샐러드 먹을 것 같은데...? 그 앞에서 펄펄 끓는 쌀국수를 후루룩후루룩 먹을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게 있는가. 같이 먹자고 꼬시려고 전화했더니 한국인 친구는 왜 하필 지금 금식 중인가.


    그래도 꿋꿋이 쌀국수를 테이크아웃했다. 마침 친구네 집에 가는 길목에 식당이 있다는 것이 핑계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거해 보이는 봉투와 콜라를 양손에 들고 친구네 집에 갔더니, 한 명은 타코를, 한 명은 수프를 준비한 것이 아닌가. 식탁에서 먹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소파에 앉아서 주섬주섬 포장해온 음식을 까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압도적인 크기의 내 비닐봉지를 여니 예상치 못하게도 국물과 면이 따로 들어있었다. 당황한 티를 실컷 내면서 혹시 그릇이 없냐고 물었다. 집주인 친구가 가져오는 그릇은 다 우리 집 밥공기보다도 작았다. 미국인들은 원래 이렇게 조그만 그릇에다가 조금씩 먹나. 그나저나 얘는 이런 그릇으로 콩 수프 조금을 먹고서 점심으로 치겠다는 건가. 내가 계속 곤란해하자 친구가 "Really really big one"이 있다고 보울을 가져왔는데 그냥 우리 집에서 국수 먹을 때 쓰는 사이즈였다. 내가 뭔가 부산스러워 보이자 친구가 혹시 식기가 필요하냐고 물어봤다. 내 국수가 세팅될 때까지 아무도 식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무젓가락이 있어서 괜찮다고 했는데, 친구가 작은 그릇을 하나 더 주면서 여기에 네 샐러드 담으라고 했다. 수줍게 사양했다.


    "이거 샐러드 아니야... 국수에 넣어 먹는 거야..."


    친구가 카펫에서 앉아서 누구 코에 붙일 건지 모르겠는 타코 들고 먹을 동안 나는 굴하지 않고 보울에 면을 말았다. 소파에 앉은 채로 커피 테이블에 그릇을 놓고 먹느라 허리가 빠개질 것 같았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음식을 입에 넣으며 서로 눈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릇에 코를 박고 먹었다. 면은... 호로록 먹으면서 고개를 똑바로 들 수가 없는 음식이 아닌가. 민망함도 모르고 면발은 호로록호로록 잘만 넘어갔다. 그래, 뭐... 한국인 친구랑 놀려면 너희도 이런 날이 있는 거지. 성실맨에게 자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오늘도 쌀국수 먹었다, 부럽지?"


@7isu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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