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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젬마 Feb 20. 2021

나는 왜 이렇게 영어를 못할까.

    나는 왜 이렇게 영어를 못할까. 그런 푸념을 남한테 하지 않게 된 데에는 한 서너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내가 영어로 밥을 벌어먹고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러므로 내가 우는 소리를 해봤자 재수만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셋째는 제2 언어로써의 영어 교육을 석사 전공하면서 소소하게 가르치는 영어 수업들이 있는 마당에 "저는 영어를 못합니다!"하고 떠들고 다니면 교사로서의 신뢰도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실은, 정말로 솔직하게는, 매일매일 나의 영어실력에 절망하다 잠드는 것이다.


    어제자 절망의 이유는 디스커션을 망친 것이다. 망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망칠 때마다 새롭게 절망한다.


    수강하는 모든 수업에 디스커션은 꼭 포함되어 있다. 수업에 따라 어쩔 때는 디스커션 보드에 텍스트 형태로 작성해 올릴 때가 있고, 플립그리드라는 플랫폼에 셀프 카메라처럼 영상으로 올릴 때가 있고, 또 다른 때에는 그룹 멤버들과 실시간으로 화상 미팅을 하고 결과를 요약하여 제출할 때가 있다. 한국(과 중국)에서만 영어를 배워온 나는 당연히 세 번째의 경우가 가장 힘들다.


    총 네 명이 함께하는 그룹에서 국제학생은 나 하나. 미리 읽은 책을 토대로 토론을 통해 함께 답을 찾아야 하는 질문들이 주어진다. 하나하나 이야기하면서 결론을 적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서기를 맡은 미국인 친구가 말했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지난번에 그룹 리더를 맡았고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맡은 미국인 친구가 물었다.


    "근데 이 질문 무슨 뜻이야? 너희는 이해되니?"


    토론장의 유일한 국제학생은 잠시 안도했다.


    '나만 바보가 아니구나...'


    교수님이 원하는 바가 무엇일까 친구들이 자와 자와 떠드는 동안 나는 질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활자를 읽으면서 읽는 내용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얘기하는 바를 소화하는 것이 한국어로도 어려울지 영어라서 안됐던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질문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다가 zoom 화면으로 돌아오니 다들 어느 정도 정리를 한 모양이었다.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이렇게 해보고 교수님이 피드백을 주면 다음번에 반영하자"는 정도의 결론이었다. 그런데 나는 질문을 꼼꼼히 읽느라고 친구들이 말하는 "이렇게"가 어떻게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친구 1이 무언가를 길게 말했다. 불쌍한 국제학생은 "이렇게"가 어떻게일까 생각하다가 내용을 놓쳤다.

    친구 2가 무언가를 길게 말했다. 불쌍한 국제학생은 친구 1이 말한 게 뭐였을까 생각하다가 내용을 놓쳤다.

    친구 3이 무언가를 길게 말했다. 불쌍한 국제학생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당황하다가 내용을 놓쳤다.

    그리고 마침내 친구 1이 물었다.


    "자, 그럼 젬마는 어떻게 할래?"


    나? 나 뭐? 돌아가면서 대답하는 거였어? 뭘 얘기해야 되는데?


    당혹감에 아무 말도 못 했더니 친구 2가 말했다.


    "Uh-oh. 젬마의 컴퓨터 화면이 멈춘 것 같은데. 비가 와서 인터넷이 끊기나 봐."


    이젠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몰려와서 얼굴이 빨개졌다. 눈동자 여섯 개가 사실은 멈추지 않은 나의 화면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나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영어고 뭐고 뇌에서 언어 자체가 사라진 기분이다. 인간은 생각을 모국어로 하기 마련인데 내 머릿속에서 영어는커녕 아무 한국어조차 안 들리는 것이 언어를 관장하는 나의 어떤 부분이 그대로 도려내진 기분이었다.


    "어... 음..."


    잠시 집중력을 잃었던 눈동자 세 쌍이 다시 고개를 들어 화면을 본다.


    "그게..."


    세 개의 입이 참을성 있게 미소 짓는다. 나의 affective filter가 올라가는 것을 느낀다. 언어학습자는 동기유발이 되지 않을 때, 자신감과 자존감이 떨어질 때, 불안이 증가할 때 심리적 장벽이 높아지고 언어 습득력이 떨어진다. 갑자기 간단한 말조차 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전공지식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게... 나 사실 아까부터 놓쳤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자존심이 너무너무 상해서 울고 싶다. 나의 착한 그룹 멤버들은 ESL 교사들 답게 나의 길 잃음에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그렇구나. 너는 이러이러한 상황에 있잖아, 그러니까 한번 이런 쪽에서 접근해보면 어떨까? 이거랑 저거를 적용해서 한 번 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여전히 방향감은 찾지 못한 채 그냥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이쯤 되면 영어를 전공하고 해당 분야에서 일을 해왔다는 사실, 지난 학기 내내 줄곧 A만 받았다는 사실, 미국인 친구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놀 수 있다는 사실, 어쨌든 꾸역꾸역 디스커션과 페이퍼를 해내고 있고 한 번도 제출하지 못한 적이 없다는 사실 등은 하나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자존감이라는 것이 갑자기 바닥을 친다. 디스커션이 끝나자마자 이불을 덮고 누웠다. 왜 나는 친구들의 도움이 없이는 디스커션에 원활하게 참여하지 못할까? 왜 나는 한 번씩 맥락에 안 맞는 소리를 해서 침묵이 흐르게 할까? 이런 류의 토론에서 항상 주도적으로 이끄는 성격이었는데 왜 나의 리더십을 여기서는 십분 발휘하지 못할까? 나는 사실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쟤네들은 모국어로 하고 나는 외국어로 해야만 해서 나의 능력보다 못한 결과를 얻어야 되지? 쟤네들이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업혀간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분하다. 억울하다! 나는 왜 이렇게 영어를 못하지!?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리고 대학원 첫 학기 둘째 주에 교수님의 사무실에서 나눴던 대화를 상기한다.


    "어렵진 않니?"

    "할만해요."

    "한 번도 안 찾아오길래. 정말 괜찮은 거니 아님 속으론 패닉하고 있니?"

    "아직까진 진짜 괜찮아요."

    "다행이다. 많은 유학생들이 첫 주에 드롭하고 싶어서 찾아와. 갑자기 읽고 써야 하는 영문 텍스트의 양에 압도당하거든. 그건 지극히 정상이고, 이 프로그램은 미국인들한테도 똑같이 어려워. 나는 석사 첫 학기에 매일 울었는데 너는 아직 안 울었다니 네가 나보다 낫구나.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렴."


    이번엔 두 번째 학기에 화상으로 나눴던 대화를 생각한다.


    "교수님, 매일매일 저한테 너무 실망스러워요. 다른 친구들보다 읽는 것도 느리고 쓰는 것도 느리고 오래 걸린 것 치고 더 나은 결과를 내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디스커션만 하면 언제 끼어들어서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당연하지. 영어는 너의 모국어가 아니잖니. 너의 영어는 출중하다는 말을 먼저 해주고 싶구나. 그런데 나는 너한테 미국인 학생들하고 똑같은 수준의 유창성을 기대하는 게 아니야. 그들에겐 없는 너만의 통찰력과 경험에서 비롯된 색다른 시각을 기대하는 거야. 너한테 없는 게 다른 사람들한테 있을지 몰라도 그들에게 없는 게 너한테 있기도 해."


    그런 따뜻한 대화에서 나는 힘을 얻은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약간 선이 그어진 느낌도 받았다. 외국어로써 영어를 배워서 다시 영어로 영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황홀한 경험이다. 그런 메타적인 순간들은 정말 짜릿하다.


화상 수업 진행 시 참고하려고 붙여놓은 메모와 대학원 과제로 제출하는 레슨플랜 양식. 목요일 밤에 가르치는 이민자들 대상 영어수업은 정말 즐거운 시간이다.


    영어 모국어 화자들은 보지 못하는 시선으로 영어를 보고, 그들은 읽어서 이해하는 학습자의 어려움을 가슴 깊이 공감한다. 모국어적 직감은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오히려 그 직감이 방해가 되는 영어 모국어 화자들을 제치고 문법적 분석을 척척 해내면서 구문론과 문법 수업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때는 너무 좋아서 심장이 다 찌릿했다. 그러나 영어 교사이자 영원한 영어 학습자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나는 역량과 한계를 동시에 느낀다. 내가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해도 나는 영원히 왜 이렇게 영어를 못하는지 고뇌하고 절망하면서 살 것이다. 언어학습자에게 언어를 '충분히 잘한다'는 것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므로. 나는 영원히 모국어보다는 조금 더한 긴장감을 가지고 영어를 구사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해도 나는 영원히 영어를 영어로 가르치는 순간에 혹시나 긴장을 하거나 말이 꼬여서 학생들 앞에서 어버버 해버릴까 봐 걱정하고 무서워하면서 수업에 임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아무리 영어를 잘하게 되어도 영어가 한국어 같을 수는 없다. 그것이 다른 영어학습자들에게 가 닿는 나의 강점이자 자꾸만 밤마다 머리를 싸매게 만드는 한계이기도 하다는 것을, 머리론 알겠는데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막상 열심히 준비한 디스커션이 이렇게 엉망이 되면 정말 속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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