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이 Sep 12. 2020

토요일 오전부터 소리를 질렀다

동거인들의 디테일한 싸움

남친과 반 동거를 시작한 지 8개월이 지났다. 반 동거라고 말한 이유는 우리는 매일 얼굴을 보고 같이 잠에 들지만 그는 서울에, 나는 경기도 모처에 각자의 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살림살이는 따로 유지하면서 서로 같이 생활을 한다.


처음에는 그가 우리 집에 이사 오다시피 했다.

그의 속옷, 재킷, 칫솔, 화장품, 가방, 만화책, 태블릿, 양말, 반찬거리 등이 내 공간으로 시나브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지냈다.  마냥 좋은 시기였고 그 사람이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지치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 큰 평수가 아닌 데다 내 물건들로도 집은 이미 꽉 차 있었기 때문에 그의 면도기 하나조차 거슬리는 순간이 온 것이다. 어쩌다 그가 무심코 벗어둔 양말에도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화가 났다. 집이 점점 좁아지고 나도 숨 막혔다.


우리는 정서적으로, 또 물리적으로도 각자의 space가 필요해졌고 결국 남자 친구는 비가 많이 내리던 토요일 오전 자신의 짐을 챙겨서 떠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물건들이 집에 산적해있었다. 난 우체국 택배 규격박스 중 가장 큰 호수로 2개를 사서 남은 짐을 싸서 보냈다. 그렇게 각자의 공간에서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지난 몇 달 동안 벌어진 일들을 거리를 두고 천천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동안 어떤 것도 계산하거나 재지 않고 달려왔다는 걸, 서로가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했었음을, 그리고 서로 아직 너무나 좋아한다는 걸 인정했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남자 친구를 다시 만났는데, 반갑고 애틋했다.

한번 붙어 지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또다시 만나니 떨어지기가 싫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반 동거를 시작했다. 단, 다시는 그가 자신의 물건을 우리 집에 두지 않는 조건으로 말이다. 요즘 그는 퇴근 후 자신의 집으로 가 빨래도 돌리고 쉬면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 뒤 우리 집으로 와서 나와 놀다가 다음날 서울로 출근을 한다. 남친의 물건이 없기 때문에 예전보단 답답하거나 불편한 점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청소였다.

새벽같이 출근하는 그와는 다르게 나는 조금 여유 있게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조금 더 집에 신경을 많이 쓴다. 내 집이고, 완전한 동거는 아니니까 그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분명 그도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일을 보는데 나만 화장실 청소를 하는 건 부당했다. 또 같은 침대를 쓰는 데 늘 나만 이불을 털고 배겟닢을 세탁하고 이불 빨래를 하는 것도 억울했다. 공유하는 부분에 대해선 번갈아가면서 아니면 함께 청소를 해야 하는데 출근하기 전에 혼자 집을 청소하다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너무 나빴다. 그래서 평화로운 토요일 오전부터 그에게 그동안 내가 느낀 것들을 와다다다 쏟아냈다. 갈등, 싸움, 언쟁 이런 거 너무 싫어하는 나지만 그래도 그걸 피할 수는 없지 않나. 남자 친구는 미안하다고 화난 나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내가 감정이 격앙될 때 그가 보이는 특유의 상체를 쭈그리는 몸짓이 있는데 그 모습을 보니 그것대로 또 더 화가 치밀었다.  


이미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 언쟁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서로 껴안고 해결책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영혼을 갈아 넣어 부엌을 청소하고 있다. 그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왠지 나보라고 저렇게 하는 거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런 그가 난 귀엽다. 귀여워 보이면 다 끝난 거다. 관계는 어떻게든 흘러갈 것이다. 반 동거인들의 삶도 어떻게든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굳이 매일 쓸 필요는 없는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