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로마에 도착해 바티칸 투어까지 마친 우리는 한결 산뜻한 마음으로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향했다.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하기 전에는 당연히 지역명이 기차역 이름과 일치할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중심역은 로마역, 피렌체는 피렌체역,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지역명과 기차역 이름은 대체로 달랐다. 로마의 기차역은 테르미니역이었으며, 피렌체의 기차역은 플로렌스 산타 마리아 노벨라역(Florence S.M.Novella)이었다. 종종 듣던 '플로렌스'가 피렌체를 뜻한다는 사실도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하며 처음 알게 되었다.
공기는 다소 쌀쌀했지만, 다행히 날씨는 맑았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역에 도착해 캐리어를 끌고 나오니, 어제 테르미니역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산뜻하고 쾌적한 느낌이 들었다. 우선 역 근처가 깔끔했고, 길을 오가는 행인들도 대부분 관광객으로 보이는 듯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로마에서는 밤이어서 그런지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아, 드디어 이탈리아를 제대로 느껴보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기대감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우리의 숙소는 역에서 1km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분명 한국에서 구글맵으로 봤을 땐 역과 매우 가까워 보였는데, 막상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가려니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여행 초반이니 기운 내자고 스스로를 응원하며 힘차게 캐리어를 끌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3박 4일 간 지낼 방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감탄했다. 어젯밤 로마의 숙소와는 차원이 다르게 깔끔하고 모던한 인테리어였기 때문인데, 이제야 숙소다운 숙소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바로 우리가 원했던 숙소!
첫째 날 숙소는 내가 혼자 결정하여 결제했는데 '도착해서 잠만 잘 거니까 뭐'라며 저렴한 곳으로 예약한 것이 실수였다.(그렇다고 그렇게 저렴한 것도 아니었다) 남편은 괜찮았다고 하지만, 난방도 잘 되지 않고 인테리어 또한 굉장히 옛스러운 곳이어서 불편함과 외풍 때문에 긴장을 풀기가 쉽지 않았었다. 반면 피렌체에서의 숙소는 우리에게 익숙한 호텔의 모습이었기에 훨씬 편안했다.
짐을 풀고 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피렌체를 눈에 담기 위해 나왔다. 앞으로 3일 동안 캐리어를 끌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나 편했다. 코스를 짜는 데 도움을 주었던 동생이 한 숙소에서 최소 3박을 하는 걸 추천한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길 참 잘했다 싶었다.
원래 남편이 가려고 체크해 두었던 식당으로 가면서 거리 곳곳을 구경했다. 밤이 되어가는 피렌체는 더욱 운치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던 유럽의 거리보다 조금 더 현대화된 느낌이었지만 골목에서 느껴지는 감성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골목 사이사이로 두오모의 쿠폴라가 보여서 설렜다.
피렌체의 대표 관광명소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지나 식당에 도착했는데, 오늘 저녁예약이 꽉 찼다고 한다. 아쉽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지나쳤던 식당들이 많았으니 지나친 곳들 중 한 군데로 가자며 남편을 이끌었다. 마침 바로 근처에 식당이 있길래 들어가니 직원분이 아늑한 안쪽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메뉴판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포모도로 스파게티와 티본스테이크 1kg, 그리고 와인 1/2병을 주문했다. 참고로, 이탈리아에서는 와인을 보틀/잔 단위 외에도 1/2, 1/4병 단위로 팔기도 한다. (두 명이서 각자 한 잔씩 마실 거면 1/4병을, 2-3잔씩 마실 거면 1/2병을 추천한다)
피렌체에 오면 티본스테이크를 꼭 먹어보라고 여러 책과 영상들에서 추천받았는데, '1kg이면 뼈 무게가 대부분이겠지 뭐'라는 나의 예상을 뒤엎는 사이즈의 스테이크가 나왔다. 두툼하고 육즙이 가득 찬 멋진 비주얼의 스테이크에 우리뿐만 아니라 옆, 뒤 테이블의 손님들의 시선까지 집중됐다.
너무 허기졌던 우리는 제대로 된 한 끼가 간절했는데, 이 스테이크를 보자마자 남편이 홀린 듯 말했다.
"와, ** 맛있겠다..!"
내 앞에서 비속어를 쓰는 일이 없는 남편이기에 놀라서 남편을 쳐다보며 물었다.
"오빠, 방금 **라고 한 거야?"
그랬더니 남편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한 말에 빵 터졌다.
"어, 그런가 봐;;"
너무 배고픈 상태에서 훌륭한 비주얼의 스테이크를 마주하니 본인도 모르게 진심이 나와버린 것이었다. 그럴 만하다.
스테이크의 비주얼에 어울리게 맛도 아주 좋았다. 두께가 굉장히 두꺼워서 잘게 잘라먹어도 입안에 고기가 꽉 찰 정도였는데, 스테이크의 향과 맛과 굽기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것이 내가 먹어본 스테이크들 중 최고였다.
한국에서는 스테이크 굽기로 미듐웰던을 선호했는데, 여기서는 미듐레어 수준의 굽기인데도 너무 부드럽고 맛있어서 굽기에 대한 선호도도 바뀌어버렸다. 다만 익히 들어왔듯 이탈리아의 음식들은 매우 짜기 때문에 스테이크 역시 많이 짜긴 했다. 그래서 더 중독성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스테이크의 맛이 놀라워서 뒤늦게 쓰지만, 포모도로 스파게티와 와인도 아주 맛있었다. 특히 스파게티 위에 뿌릴 소스를 따로 통으로 가져다주셔서 원 없이 치즈를 뿌려먹을 수 있는 게 좋았고, 와인은 적당한 바디감에 향도 좋아서 음식과의 궁합이 좋았다.
참고로 이번 여행 중 챙겨 왔던 책 중에 <와인 좋아하세요?>라는 책을 챙겨서 비행기에서 틈틈이 봤는데, 와인을 즐기는 와중에 관련 지식까지 쌓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스테이크 양이 많아서 결국엔 조금 남겼는데,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직원분이 와서 리몬첼로와 비슷한 술을 작은 잔에 한 잔씩 따라주었다. "생각 없이 그냥 쭉 마셔!"라고 말하길래 쭉 들이켰는데, 레몬의 상큼함과 달달함이 입가심을 하기에 딱 좋았다.
이탈리아는 레몬이 잘 자라는 나라이기 때문에 레몬으로 만든 제품들이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이젠 한국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리몬첼로'라는 술이 대표적이다. 식후주로 마시는 경우도 많고, 디저트와 곁들이는 문화도 있다고 한다. 빵에 리몬첼로를 적셔서 먹기도 한다는데 아쉽게도 그렇게는 못 먹어봤다.
로마의 첫 숙소에서 선물로 준 샴페인을 아직 마시지 못했기에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가며 샴페인을 마시기로 했다. 숙소에 도착해 씻고 나오니 남편은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잠시만 누워있겠다던 그는 결국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다.
바티칸 투어로 피로가 가득 쌓인 탓에 나와 남편 모두 기절해 버린 이탈리아 여행 이틀 차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