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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Jun 26. 2024

사르트르 <말>, 괴테 <파우스트>

어린 사르트르는 시모노 씨의 부재로 '만인의 기다림으로 깊숙이 파인 허공'을 알아차린다. 육신이란 '군더더기'에게 박수갈채를 보내지 않고도 느껴지는, 이미 있었던 것의 부재 감각에서, 차표 없이 열차에 올라타 끊임없이 말로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려 하는 자신과는 다른, '있다' 자체를 느꼈던 것 같다.

"순수한 부정적 본질로 환원된 이 순결무구한 사람은 다이아몬드처럼 더 이상 압축될 수 없는 투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스스로 존재하기보다 타인의 칭찬과 요구에 부합하는 사랑스러운 아기였고, 그로 인해  '시늉'만 있는 존재 방식과 존재의 필요/쓸모(본질)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질문을 하는 자(차표 검사원), 존재를 항변하는 자(무임승차자), 어디론가 가고 있는 인생(열차), 이 모든 연극을 꾸민 자 모두 자기 자신이었다. 사르트르는 부조리극의 연출자로서 '단 1분이라도 좋으니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 자기 자신이 이 모든 연극을 꾸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만이 유일한 욕망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남모르는 세상에 갇혀 솔직하게 글을 쏟아 내면서, 허상이 실상이 되고, '나 자신과도 다르고 남들과도 다르고, 삼라만상과도 다른 타자'가 되는 것을 목격한다. 책은 '물질만이 지니는 단호한 부동성으로 자기 자신을 정립한 완전한 인간이 된다.' 책을 통해 사르트르는 우연에 던져져 본질을 고민해야 하는 불확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변치 않는 본질을 갖추고 '있는' 확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있는' 것이다."

*존재한다: 본질이 정해지지 않는 인간적 존재로 자유롭게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가야 하는 불안한 대자적 존재로 존재한다.
*있다: 사물처럼 변치 않는 본질을 갖추고 즉자적으로 존재한다.

사르트르는 '자연' 상태에서 '우연'에 내던져진 자신의 운명을 구출하기 위해 부단히 글을 썼다. 그는 타인의 칭찬과 시늉, 공허함에 시달리려서 끊임없이 말하는 질병에 걸린 달변가였을 뿐이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암흑물질이 85퍼센트가 넘을 정도로 앎에 있어서 미천하다는 진실, 인간의 쓸모란 한낱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 그 누구도 실은 차표 한 장 가지지 못해 주어진 자유를 견디지 못하고 허망하게 떠들어대고 있다는 사실은 사르트르가 자신의 존재를 글로 치환하는 연극으로 귀결됐다.

나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다. 그러니 이제 조금은 덜 떠들고, 덜 들었으면. '이방인'의 뫼르소가 사형수로 느꼈던 '정다운 침묵'의 방에서 묵상했으면. 두 눈이 멀어서야 마음의 눈을 뜬 파우스트처럼, 분주히 체험하는 감각의 데시벨을 낮추고 마음의 귀를 열었으면.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파우스트

죽도록 애쓰고 고통을 이겨내도
인생은 우연 위를 부유하는 뗏목일 뿐이라는 지성의 결과는
자칫 사람을 무의미한 허공 속에 던져 놓지만,
그렇게 어둠 속에서 방황한다고 해도
올바른 길을 지향하며 날마다 노력하고 애쓴다면
언젠가 구원받으리라는 신의 믿음.

방황한다 하더라도
지향하여 애써서 자유를 이룩하기를 멈추지 말라는
신의 목소리.

그것이 괴테가 장장 40여 년간 써 내려간
인생의 깨달음이었을까.

'나는 너희 같은 무리들을 미워한 적 없으니
부정을 일삼는 정령들 중에서도
너희 같은 익살꾼들은 조금도 짐스럽지 않구나.
인간의 활동력은 너무 쉽사리 느슨해져,
무조건 쉬기를 좋아하니
내 그들에게 적당한 친구를 붙여주고자 함이라
그들을 자극하고 일깨우도록 악마의 역할을 다하라'

때론 악도 신의 계획 아래에 있다는 것.

덮어놓고 악으로 단정 짓고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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