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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림보 May 31. 2024

찬물로 샤워하기

블로그 시작 5일째

성공하자 다짐한 지 5일째. 순조로울 거라 자만하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그냥 더 잘까, 오늘은 쉴까를 되뇌기 시작했다. 오전 11시에 잠에서 깨(나는 올빼미 인간이고 바꿀 마음 없다), 기지개를 켜고 두리번거리다 맞이한 오늘이 그렇게 또 시작된 것이 썩 달갑지 않았다. 이런. 또 왔구나. 내가 언제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게 된 이유잖아. 정신 차려야지. 나는 아직 애송이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힘들더라도 기초 체력이 쌓일 때까지 버텨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욕실로 향했다.


매일 (아침은 아니지만 비유적으로) 아침 욕실에서 하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 먼저 손을 씻는다. 난 손을 자주 씻는다. 뭔가 손에 조금이라도 유분이 끼기 시작하면 기분이 께름칙하다. 그렇게 깨끗이 씻은 다음 가글을 한다. 바로 양치를 하지 않는 것은 어차피 밥을 먹을 예정이라서 그렇다. 입 안을 말끔히 헹구고 나와 방에 다시 돌아가서 책을 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책을 읽는다는 얘기 전까지만 루틴에 포함된다. 책은 그렇게 하자고 5일 전에 정한 약속이다. 그래도 잘 지켜지고 있다. 귀찮긴 하지만 뭔가 뿌듯하다.


하지만 오늘 고비가 왔다. 머리가 멍하고 단어가 두 개 겹쳐 보인다거나, 문장이 머릿속에서 렌더링이 잘 되지 않았다. 뽀모도로 기법을 활용하면서 집중력 근육을 조금씩 키워나가고 있는 와중에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어떻게든 25분을 채워야 한다. 조용히 혼잣말을 지껄이며 간신히 버텼다. 휴우. 또 실패할 뻔했지만 어찌어찌 포기는 면했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아무 의미 없는 독서가 될 것이 뻔했다. 뭔가 바꿔야 한다. 일어나서 스트레칭도 하고, 팔 벌려 높이뛰기도 하고, 물도 마셨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실수로 물이 데워지기 전에 샤워 물줄기 밑으로 들어가 억지로 찬물을 맞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제도 졸렸는데 그 사건을 기점으로 정신이 번쩍 들어서 글을 쓰지 않았던가. 그래. 찬물샤워를 하자.


다시 욕실로 향했다. 옷을 벗고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바라봤다. 김이 나지 않는다. 아마 엄청 차갑겠지, 되게 차갑겠지, 겁을 먹었지만 에라 모르겠다 뛰어들었다. 예상보다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줄 알았다. 가슴과 발에 물이 닿자마자 욕설이 자동으로 튀어나올 만큼 찬물은 끔찍했다. 분명 16도에서 20도 정도 온도의 물일 텐데 얼음을 손으로 잡을 때만큼 아픈 느낌이 들었다. 샤워 레버를 돌릴 수도 있었는데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너무 추웠고 후들거리느라 바빴다. 어떻게든 샤워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샴푸를 묻혀 머리를 감았고, 신속하게 세안까지 끝내고 나왔다. 그때 깨달았다. 이래서 찬물샤워, 찬물샤워 하는 거구나.


뭔가 굉장히 불쾌한 자극이었기에 다시는 안 한다 다짐하고 샤워를 마쳤지만 신기하게 정신이 말끔한 것이었다. 찌뿌둥함이 사라져 상쾌했다. 처음 경험한 느낌이었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분명 처음은 아닐 것이다. 찬물로 씻은 것이 처음은 아닐 테니. 하지만 이렇게 자의로 3분 정도를 냉수 아래에서 버틴다는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문명인이라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상황에 자신을 내던지면 신경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유튜브에서만 얼핏 봤던 자기계발 내용이 효과가 있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의자에 앉아 책을 폈다. 다시 25분 타이머를 설정하고 독서를 시작했다. 신기했다. 나는 단지 매일 하던 세수와 가글에 잠깐 찬물에 젖는 항목을 추가했을 뿐이다. 3~4분 짤막하게 찬물샤워를 하고 온 것일 뿐임에도 확실하게 달랐다. 머리가 멍하지 않았고 졸리지도 않았다. 정신이 똘망똘망한 채로 목표로 한 독서 시간 1시간을 채웠다. 이 페이스로 블로그에 올릴 글도 써야겠다 생각했다. 분명 같은 일을 오래 반복하다 보면 뇌는 또 나에게 쉬라 유혹할 것이 뻔하다. 제일 쌩쌩할 때 미리 할 일을 해치워 두면 좋을 것 같은 생각에 일에 착수했다. 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고 오늘 해야 할 일 대부분을 일어난 후 5시간 안에 모두 해결했다. 글을 썼고(아직 조회수는 0이지만), 이미 써 놓은 글을 검수도 했고, 블로그에 업로드도 했다. 


나는 혼자 이리저리 공상도 많이 하고, 혼잣말도 빈번히 하는 편이니 아이디어가 떨어지는 일은 잘 없다. 글 쓰는 일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막상 책상 앞에 앉아 메모장을 켜고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하면 2,000자는 수월하다. 아침에 정신이 멍해서 집중이 잘 안 되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이 고민이었지만 찬물샤워라는 새로운 스킬을 손에 얻었으니 이 문제도 해결이 됐다. 이제 다음 과제는 내 저질체력을 정상체력으로, 나아가 좋은 체력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매일 많은 일을 해낼 수 있게 건강해질 시간이다. 또 살도 빼야 하는 시간이다... 속으로 생각한다. 한 번에 하나씩만 하자. 천천히.


꾸준히 무언가를 매일 싫증이 나더라도 해내는 것은 불쾌한 경험이다. 그럼에도 이런 과정은 나의 삶에 지지대가 되어 주고, 살아간다는 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좋은 것만, 단 것만 찾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이 세상의 아이러니가 참 신기하기도, 억울하기도 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한낱 미물인 인간 주제에 자연에 토를 단들 아무런 변화를 꾀할 수 없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찬물샤워도 이런 이치와 맞닿아있다. 나쁘지만 좋은 것, 싫지만 기쁨인 것. 운동도, 건강한 식습관도 다 마찬가지다. 오늘도 나는 차디찬 물에 고통을 받으며 또 하나 깨달았다. 이 짓을 내일도, 모레도, 매일매일 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지만, 그럼에도 그런 과정이 삶을 더욱 예리하고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굳게 마음을 다잡는다.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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