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조금만 더 참아봐. 거의 다 왔어"
망했다. 벌써 10시간 넘게 화장실을 가지 못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 베이징. 그 대도시 도로 한복판의 버스 안에서 나는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등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베이징으로 여행 가기 한 달 전, 대학원 졸업을 앞둔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아르바이트로 3년 동안 조금씩 모아두었던 적금을 깼다. 의미 있는 돈을 가치 있게 쓰고 싶어서 가족들에게 첫 해외여행을 제안했다. 아빠는 일을 쉴 수 없다고 했고, 엄마는 무슨 해외여행이냐며 너희끼리 다녀오라고 했다. '첫 외국여행인데 부모님 없이 다녀올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성인인데 뭐 어때!' 오기가 생겼다. 당시 대학생이던 여동생과 초등학생 남동생을 데리고 다녀오기로 했다. 마침 여동생이 하얼빈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시기라, 여행지는 중국 베이징으로 정했다.
중국에서는 영어가 잘 안 통한다고 해서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지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동생의 짧은 중국어와 휴대폰을 사용해서 퀘스트를 깨 듯 계획한 곳, 먹으려고 했던 음식을 하나씩 클리어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기 전 마지막 일정은 만리장성이었다.
만리장성은 베이징을 벗어나 시외로 나가야 했다. 버스는 처음이었다. 사기꾼이 많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들어서 긴장이 됐었나 보다. 숙소를 나서기 전 화장실에 다녀왔는데도 또 가고 싶었다. 만리장성에 도착하면 있으리라 생각하며 참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답게 인파가 굉장했다. 외국인도 많았다. 역시나 화장실도 줄이 길었다. 아직은 참을만한 정도라 돌아가기 전에 가기로 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내려오는 길에도 사람은 북적북적했다. 미리 예매해 두었던 버스의 시간은 다 되어갔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화장실로 냅다 뛰었지만 순서를 기다렸다가 볼 일을 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게 나는 망했다. 망해버렸다.
몸이 배배 꼬였다. 다리가 덜덜덜 떨리다 못해 저려올 때쯤 베이징역에 도착했다. 일단 한고비는 넘겼다. 동생이 먼저 내려 중국어로 화장실을 물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전속력으로 달렸다. 초등학생이었던 남동생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는지 별말 없이 따라왔다. 거기도 사람이 많으면 어쩌지. 외국의 공용화장실은 돈을 내라던데 시간이 오래 걸리면 어쩌지. 못 쓰게 하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짧은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드디어 도착!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다행히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손놀림으로 문을 닫고 앉았다. '휴우' 급했던 볼일과 함께 안도의 숨을 내보냈다. 문제가 해결되자 웃음이 터졌다. 10시간 넘게 내 몸을 짓누르던 고통이 해소되는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게 뭐라고. 동생들과 함께 키득키득하며 숙소로 향했다.
남동생은 중국 여행을 떠올리면 어떤 여행지보다도 화장실이 먼저 생각난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오줌싸개 한국인으로 기억될 뻔한 아찔했던 순간. 몸과 마음이 온통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던 경험. 내 눈과 귀를 스친 게 무엇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시간. 내 인생 평생 결코 잊을 수 없는 여행이 되었다. 3년 동안 모은 돈으로 다녀온 첫 해외여행은 그렇게 화장실로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