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연말이다. 아파트 단지 내에도, 거리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난다. 이맘때쯤 우리 집에는 연례행사로 '재무 워크숍'이 열린다. 2018년부터 시작했으니 올해로 5년째다. 워크숍이라고 해서 무언가 배우는 것은 아니다. 지난 1년 동안 기록해 둔 가계부를 보고 남편과 함께 수입과 지출을 비교하고 반성하는 시간이다.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이가 기저귀를 뗐다거나, 강아지가 아파서 병원에 갔던 일부터 내 집 마련까지 "맞아, 이때 그랬지" 하며 크고, 작은 일을 나열해 보고, 대화를 나눈다. 작년 워크숍에서 각자가 3개씩 세운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도 점검한다. 금연과 다이어트는 매년 포함되는 목표다. 결과가 좋거나 잘했으면 서로에게 칭찬을, 진행 중이거나 실패했다면 내년에 더 열심히 하겠노라고 다짐한다.
평소에 먹어보지 못한 특별한 음식도 준비한다. 작년 메뉴는 연말 분위기에 어울리는 따뜻한 와인, 뱅쇼와 브리치즈 구이였다. 나는 아이를 재우고 미리 준비해 둔 음식을 데웠다. 에어프라이어에서 갓 나온 브리치즈 구이는 견과류와 어우러져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계피와 오렌지, 사과와 함께 넣어 끓여 낸 뱅쇼의 향긋한 향은 코 끝을 간질였다. 처음 만든 것치고는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남편은 노트북을 식탁 위에 설치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노트북에 담아 둔 파워포인트 자료를 열고 대화를 이끄는 것은 나였다. 내가 우리 집 재무부 장관이기 때문이다. 결혼 후 자연스럽게 돈 관리는 내가 맡았다. 나는 부부로서 함께 사는 몇십 년 동안 우리의 돈주머니 사정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쪽에서만 가족의 미래를 고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고, 이를 남편과 나누기 위해 '재무 워크숍'을 만들었다. 다행히 남편도 내 생각에 동의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참여하겠노라고 의사를 밝혔다. 그런 행사였는데..
올해는 망했다. 가계부를 6월부터 쓰지 않았다. 재무부 장관으로서 탄핵받아 마땅한 일이다. 억울할 것도 없다. 내가 게으른 탓이다. 하지만 변명을 조금 보태자면 이사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은 6월에 이사를 했다. 전세 살다가 내 집 마련으로 이사했으니 우리에게는 엄청난 변화이자 큰일이었다. 이사를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짐 정리도 고됐지만, 새 집을 꾸미고 가전, 가구를 들이는 일도 무시할 수 없었다. 크고 작은 돈이 여기저기에서 빠져나갔다. 조금이라도 더 싸게 물건을 사고, 예약을 하겠다며 이 카드, 저 카드를 썼다. 부모님이 새살림을 사는데 보태라고 주신 현금도 있었다. 평소의 체크카드 하나만 쓰던 소비 루틴에서 벗어나니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결제 내역 찾기가 쉽지 않았다. 습관이 들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나 보다. 우리 집 재무부 장관이라는 역할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줄 몰랐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아직 재무부 장관 자리에서 내려올 수 없다. 새해를 기점으로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간 외면해 온 가계부 파일을 열었다. 지난 6개월치의 데이터가 없으므로 '정상'적인 재무 워크숍은 어려울 것 같았다. 대신 리뉴얼 해보기로 했다. 내가 엑셀로 만들어 사용했던 가계부는 전문가가 만든 것이 아니었기에, 쓰면서 불편한 점이 있었다.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웠고, 만기가 끝난 적금이나 예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필요 없는 것은 지우고, 지출이 없는 날, '무지출 데이'를 따로 표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2주만 지나면 새해가 시작된다. 내년에는 최대한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집 대출 갚는데 올인하기로 했다. 이제 새로운 마음가짐과 리뉴얼한 가계부로 미래를 그려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