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버넌스 개혁,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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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드라기 보고서를 다루는 기사를 읽다가 ‘거버넌스 개혁’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유럽연합의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를 단순화해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유럽만의 것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제안은 넘쳐나지만 실행은 더디다. 기후위기, AI, 팬데믹 같은 글로벌 현안 앞에서 각국 지도자들은 자기 나라 이익만 말한다. 국제기구는 많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럴 때 문득 떠오르는 상상이 있다. 전 세계 단일 지도자. 황당한 공상처럼 들리지만, 사실 철학자·정치학자·과학자들이 오래전부터 고민해 온 주제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세계시민법을 말했고, 아인슈타인은 핵무기 시대에 “세계정부 없이는 인류가 생존하기 어렵다”라고 경고했다. 유엔이 출범했지만, 여전히 조정자 역할에 머물고 있다. 오늘날 학계는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세계정부론이다. 지구 전체를 연방정부처럼 운영해 단일 지도자가 글로벌 어젠다를 집행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글로벌 거버넌스론이다. 각국·기업·시민사회가 네트워크처럼 협력하며 분권적 운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제는 영화 속에서도 반복된다. 최근 본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지진 후 살아남은 아파트 주민들은 작은 세계정부를 실험한다. 권력을 쥔 자는 왕처럼 군림하고, 주민들은 생존과 정의 사이에서 흔들린다. 유토피아가 쉽게 디스토피아로 변하는 아이러니. 토머스 모어가 말한 “어디에도 없는 곳”은 여전히 우리 상상 속에만 머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정부적 상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 같은 다중 위기 시대에, 글로벌 단일 지도자 혹은 단일 의사결정 구조가 없다면 인류는 문제 해결에 번번이 늦을 것이다. 물론 현실적 장벽은 높다. 주권을 포기하려는 국가는 없고, 민주적 정당성 확보도 쉽지 않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그 상상이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반드시 다시 꺼내야 할 질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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