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가 내게 말한다

내면- 감정의 결을 들여다보는 시간

by 나검하랑

11. 마음이 무거운 날, 자연스레 손이 가는 것들


가끔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습니다.
누구의 위로도 쉽게 닿지 않고, 그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스리고 싶을 때 말입니다. 그런 날에는 이상하게도 밝은 색보다는 어둡고 차분한 색들이 눈에 들어오곤 합니다. 회색빛 하늘, 탁한 블루, 혹은 짙은 네이비 같은 색들 말이지요. 마치 그 색이 지금의 마음을 대신 표현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심리상담 현장에서 내담자분들과 함께 색을 다루다 보면, 우울하실 때 특정한 색에 끌리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마음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무의식적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울한 감정이 깊어질 때 사람의 내면은 외부 자극을 줄이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밝은 색은 생기와 활력을 주지만 동시에 눈과 감정에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 이미 마음이 지치고 피로할 때는 그 밝음조차 부담이 되어 거부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감싸주고 숨길 수 있는 색, 즉 ‘감정을 보호하고 안정시켜 주는 색’을 선택하게 됩니다.

회색은 감정을 중화시키는 색이며, 외부의 시선을 잠시 차단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블루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화시키는 색으로 슬픔을 부드럽게 품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색채심리학자 막스 루셔(Max Lüscher)는 “사람이 선택하는 색은 현재의 심리 상태를 드러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우울한 상태에서는 회색·블루·블랙과 같은 색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게 나타납니다. 이는 외부 세계와의 거리를 두고 ‘나만의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려는 무의식적 욕구의 표현입니다. 즉, 우리가 끌리는 색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무의식이 보내는 심리적 언어인 것입니다.


저 또한 마음이 힘들었던 시기에 유난히 블루를 가까이 두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다를 찾아가고, 카페에서 푸른 하늘과 바다를 보았습니다. 그 색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숨이 고르고, 감정의 파도가 조금씩 잦아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블루는 슬픔을 지워주는 색이 아니라, 슬픔을 조용히 안아주는 색이라는 것을요. 우울하실 때 우리는 위로를 원하지만, 동시에 간섭받고 싶지 않은 복잡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때 블루나 그레이 같은 색은 마치 조용히 어깨를 감싸듯 “괜찮아요, 지금 이대로 괜찮습니다.”라고 속삭여주는 듯합니다.


심리학적으로 우울은 감정의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의 과잉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은 생각과 감정이 얽혀, 뇌와 몸이 잠시 ‘멈춤’을 선택하는데, 이때 어두운 색을 찾는 것은 감정의 소음을 줄이려는 자기 조절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담자분들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우울하실 때 억지로 밝은 색을 보려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지금 마음이 자연스럽게 끌리는 색이 있다면, 그 안에 잠시 머물러보세요. 그 색이 아마도 지금의 마음을 대신 이야기해주고 있을 것입니다.” 라구요.

다만 한 가지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어두운 색은 마음을 보호해 주지만, 너무 오래 머물면 ‘움직임’을 잃게 합니다. 그러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주 미세한 변화라도 스스로에게 허락해 보시길 바랍니다. 짙은 블루 사이에 한 줄기 라이트블루를 섞어보거나, 회색 안에 따뜻한 베이지를 놓아보는 식입니다. 그것은 억지로 기분을 바꾸려는 시도가 아니라, 회복으로 향하는 부드러운 신호가 됩니다.


우울하실 때 끌리는 색은 우리를 닫히게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이해하게 해주는 창이 됩니다. 그 색을 부정하지 마시고, 그 안에서 충분히 머무르신 뒤, 준비가 되셨을 때 천천히 다시 빛으로 나아가시면 됩니다.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듯, 색에도 좋고 나쁨은 없습니다. 지금 마음이 머무는 색조차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오늘 하루, 당신의 마음은 어떤 색을 띠고 있으신가요?
혹시 조금 어둡더라도 괜찮습니다.
그 색은 당신 마음이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는 신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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