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패션에 관해
'미국 사람들은 옷을 못 입는다'라고 생각했다. 유행에 민감하고 세련되게 옷을 입는 한국인에 비해 미국 사람들은 아무 옷이나 대충 걸쳐 입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인이 한국인보다 옷에 신경을 덜 쓰는 건 사실인 것 같다. 나도 한국에 있을 때와 미국에 있을 때 입는 옷이 많이 달라진다. 한국에 있으면 아무래도 밖에 나갈 때 뭘 입어야 할지 더 신경 쓰게 된다.
그렇다고 '한국 패션이 미국 패션보다 낫다'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다. 예를 들면 미국으로 유학 온 한국 유학생(남자)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헤어스타일, 스키니진, 플랫슈즈, 사각진 가방, 뿔테 안경 등이 단서다. 이런 한국 패션이 한국에서는 멋지게 받아들여져도 미국에서는 아니다. 대개의 경우 '투머치'다. 이런 한국 패션을 두고 FOB(Fresh Off the Boat)이라고 비하하거나 게이라고 의심하는 친구들도 있다. 미국 문화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한 패션 스타일이 유행하려면 그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치관이나 문화에 부합해야 한다. 그 바운더리를 벗어나면 아무리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해도 옷을 잘 입는 게 아니다. 미국에는 미국만의 후리한(?) 패션 스타일이 있다. 미국에서 이런 패션 스타일이 만들어진 데에는 미국 사람들이 공유하는 가치관과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한다. 나는 그 사회적 배경들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Disclaimer: 지역, 개인마다 편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남자의 관점에서 쓴 글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한국보다 성평등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제도적으로 더 평등할 수는 있어도 문화사회적으로는 별로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한국보다 더 남성성과 여성성이 뚜렷이 나뉘어 있다.
또 미국은 전통적으로 기독교 국가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편견이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남자가 여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이상할 정도의 거부 반응을 보인다. 이것을 '호모포비아(Homophobia)'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별것 아닐 동성 친구와의 스킨십이나 제스처가 미국에서는 쉽게 게이로 의심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남성이 이런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남성성을 더 부각시켜야 한다. 주로 옷치장에 신경을 쓰는 것을 여성적 특질로 인식하기 때문에 '남자는 꾸미면 안 된다'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고 이것이 미국의 후리한 패션을 형성한 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적 생각이다.)
최근 한국에도 헬스 바람이 불고 있다. 단백질 보충제를 위시한 여러 보충제 시장도 커지는 추세다. 하지만 이런 문화는 미국에서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미국 하이틴 영화를 보면 남자 주인공은 대부분 운동부 주장이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이렇게 운동 잘하는 사람을 jock이라고 부르는데 소위 잘 나가는 친구들이다.
이처럼 미국은 운동 잘하는 사람을 한국에서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옷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은 여성적으로 인식되지만 근육은 남성성의 상징이다. 그래서 남자들이 옷 쇼핑을 하는 대신에 근육을 키운다.
근육을 키우고 그것을 과시하는 탱크탑을 입는 남자들도 많다. 또 반바지 반팔을 입었을 때 잘 보이는 장딴지와 이두근을 키우기도 한다. 사실 몸이 좋으면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어도 옷태가 사는 법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몸을 키우는 것이 패션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단일민족국가다. 미국에 있다가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가면 인천공항에서부터 놀라움을 느낀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비슷한 피부색과 머리색, 이목구비를 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비슷한 모양을 한 사람들을 복제한 느낌마저 든다 (비하하려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피부색, 이목구비, 체형까지 비슷하면 옷에서라도 개성을 내야 돋보일 수 있다. 한국인들이 유난히 옷에 신경을 많이 쓰는 이유 중에 인종적으로 동종(homogeneous) 국가라는 사실도 한몫하지 않을까 싶다.
그에 비해 미국은 중동, 남미, 아프리카, 유럽,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등 다양한 곳에서 온 사람들이 섞여 사는 나라다. 생김새, 체형, 이목구비, 눈동자 색, 머리색, 피부색이 각자마다 너무 다르다. 그러니 굳이 옷으로 더 자기 자신을 돋보여야 할 동기가 약하다.
한국에서도 동네 마실 나갈 때 옷을 꾸며 입고 나가진 않는다. 바라보는 이목이 없으면 옷에 덜 신경 쓰게 된다. 미국은 한국보다 인구밀도가 훨씬 적다. 한국 인구 밀도가 349.06명/km2인 반면 미국은 34명/km2밖에 안된다. 한국의 1/10 수준이다. 같은 크기의 공간이라면 평균적으로 한국에서 10명을 마주칠 거 미국에서는 1명밖에 마주치지 않는다. 어차피 볼 사람도 별로 없는데 잘 꾸며봐야 소용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