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류장은 '낭만공원' 입니다."
학원 튜터 알바를 가는 길이었다. 절대 늦기 싫어 늘 일찍 나오는 버릇 덕분에 오늘도 20분 정도 빨리 도착할 것 같았다. 마침 날씨도 좋았다. 버스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나는 문득 이번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4초가 흘렀을까.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나는 그냥 일어나 가방을 들고 당당하게 버스 뒷문으로 걸어가 카드를 찍고 내렸다. 그런데 내리자마자 불안이 훅 밀려왔다. 그렇다. 카드를 찍고 내리긴 했는데, 그걸 다시 넣을 카드 지갑이 없다. 가방 옆주머니를 뒤졌지만 없었다. 그렇다. 타칭 가끔 뇌 빼고 다니는 나는 내가 지갑을 놓고 내렸음을 확신했다. ‘괜찮아. 요즘은 지갑쯤이야 다 찾지. 일단 카드가 나한테 있으니 오가는데 문제없고, 뭐 사는데 문제없지...’라는 생각이 스치는 동시에 ‘ㅈ됐다.’라는 생각도 함께 지나갔다.
그 이유는 아르바이트한 지 2일 된 공차. 나는 공차 오픈이라 가게 키를 내가 가지고 있었다. 그 키로 매일 아침 8시 30분에 문을 열어야 했다. 매일매일 혼나면서 배우고 있는 요즘일터라 점주님께 ‘제가 지갑을 잃어버려서요..’라고 주저리주저리 설명할 입장이 못됐다. 이틀 만에 ‘대충 본다.’ ‘덜렁거린다.’ ‘칠칠맞다.’라는 소리를 들은 나로서 여기서 이미지를 더 깎일 순 없었다. ‘참 나란 인간 왜 이럴까.'하는 생각까지 왔을 때 버스는 이미 저 앞으로 가버렸다. 그렇게 중요했으면 뛰어가 손을 흔들 법도 한데, 내 다리는 너무 느긋했다. 방금 전 꽤나 당당하게 버스에서 걸어 나왔는데 미친 듯이 버스까지 달려가는 건 쪽팔렸다. '달려갔어도 못 잡아.’라고 합리화하며, 내린 정류장과 시간을 휴대폰 지도 앱에서 캡처했다. 그 이후로 학원 알바 시간까지는 온통 분실물 문의 전화를 돌리는 데 썼다. 승진여객, 경기도 교통정보센터 등.. 마지막까지 찾은 최선의 방안은 다음날 여객회사에 전화해 분실물이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차고지에 들러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한테 다음날은 없었다. 나는 오늘 막차 시간이 끝나고 나서라도 찾았어야 했다.
또 정신없이 지나간 알바가 끝나고 8시 10분이 되었다. (이게 문제다. 늘 정신이 없다._.) 이제 다시 지갑 찾기에 머리를 굴려야 했다. 머릿속에 꽃밭 비중이 상당한 내가 생각한 환상적인 해결책은 내가 올 때 타고 온 버스를 그대로 타는 것이었다. 네이버 지도 앱에서 확인해 보니 마을버스는 현재 14대 운행 중이었다. 그러니까 1/14의 확률로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서 탈 수도 있었겠지만 왠지 하늘이 집 반대 방향으로 지금 막 오고 있는 810번 버스를 잡아 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버스를 타기 위한 정류장까지, 나도 그 버스도 신호등 하나가 남은 상태였다. 신호가 어떻게 바뀌냐에 따라 탈 수 있고 말고가 정해졌다. 내 쪽 신호가 먼저였고, 은근 변태 같은 면이 있는 나는, 모처럼 이런 스릴을 즐기면서 정류장까지 달렸다. 곧이어 버스가 도착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먼저 도착했다는 성취감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정신 차리고. 해결이 꼭 필요한 이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사실 내가 자주 타고 다니는 이 마을버스는 기사님들이 대체로 난폭하시다. 짧은 루트를 14대나 돌기 때문에 다들 주황불에는 어김없이 거센 액셀을, 짧은 횡단보도 앞 빨간불에서는 약하게 액셀을 밟으시는 분들이시다. 맨 뒷자리에 앉으면 놀이기구를 경험할 수 있는 그런 버스. 나에게 810번은 그런 이미지이다. 그래서인지 버스가 도착하고 내 사정을 말하려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어 제가 버스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는데요. 810번에서 두고 내려서요. 혹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러지 말고 승진 여객에 전화해 봐요. 내일이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아 제가 전화는 해봤는데, 상담시간이 끝나서요. 제가 오늘 밤에라도 찾아야 돼서요.”
“일단 타.”
“네, 감사합니다.”
‘뭐지. 일단 1/14 확률의 선택은 틀렸고... 집도 반대편인데 이제 남은 13개 버스를 대기 타고 다녀야 하나...’
“학생이야?”
“네 대학생이요.”
“그거 오늘 꼭 찾아야 해?”
“네, 내일 알바 가야 하는데 거기 카드가 있어서 꼭 필요해요...”
“언제쯤 내렸는데?”
“4시 38분쯤에 꽃매마을이요.”
“버스 번호는 몰라?”
“네...”(나중에 깨달은 건데, 지도 앱에서 버스 배차 간격 보기로 더 자세히 들어가면 운행 중인 버스들이 보이고 그 옆에 버스 번호들도 다 쓰여 있다. 그걸 잃어버린 시점에 버스 번호까지 캡처했어야 했다..)
“지갑 무슨 색이야?”
“아이보리색이요.”
“뭐 카드지갑이야?”
“네 작은 카드지갑이에요.”
어떻게 흘러나가 싶었을 때쯤, 기사님께서는 무전기를 드시더니
“긴급 공지 하나 하겠습니다. 오늘 오후 5시경 단국대에서 좌회전하자마자 첫 번째 정류장 즈음에서 잃어버린 아이보리색 카드지갑 발견하신 분 연락 부탁드립니다.”
“기다려봐.”
한 5분쯤 지났을까. 아무 연락이 오지 않자, 기사님께서는 다시 무전기를 드셨다. 그리고 “꼭 찾아야 한답니다.”라는 말을 덧붙여 아까 한 말씀을 반복하셨다. 기사님 바로 뒷자리에 앉은 나는 무전기에 어떤 연락이라도 오기를 바라며 애가 타는 마음으로, ‘곧 오겠지. 곧 오겠지.’하며 앉아있었다. 두 번째 연락을 돌리고 난 지 한 2분 정도 지났을까.
“????? 있ㄷ니다.”
운전 중이시던 기사님이 신호등에 걸리자
“아까 하셨던 말씀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속으로 ‘되게 태양의 후예에 나오는 군인같이 말씀하시네. 예의 바르시다..’ 생각하고,
다른 기사님이 말씀하신 것 같은데,
“아이보리색 지갑 04번 차량에 있댑니다.”
“아 감사합니다~.”
‘헉 대박. 찾았다. 역시 상담센터고 뭐고 무전기가 짱이다.’
그러고 나서 기사님께서는 04번 버스 기사님께 전화를 하셨고, 아마 04번 기사님께서는 ‘분실물 보관함에서 찾으면 되지’라고 말씀하신 듯하다. 이에 우리 기사님은
“아니, 거 형님이랑 나랑 어디서 만나더라? 거 단국대에서 좌회전해서 맨 먼저 정류장 거기서 아가씨 서 있으라 할게. 회사 가는데 꼭 필요하대.”
‘나 회사 다녀~! ㅎㅎㅎㅎ’
“들었죠? 거기 내려줄 테니까 반대편 가서 타요.”
“네 진짜 감사합니다.”
“운 좋은 줄 알어. 나 만나서 찾아준 거야.”
“그러니까요. 저 810번 버스 기사님들 중에 이렇게 친절하신 분 처음 봬요......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뭘 보답해. 말로 고맙다고 하면 됐지.”
그렇게 지갑을 찾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기사님과 대화를 나눈 뒤 기사님 좌석을 바라보는데, 그 순간 버스의 낭만이 느껴졌다. 그 순간 곳곳에 있는 동그란 모양의 스탑 버튼은 예쁜 조명이었고, 기사님이 주황빛의 조명을 켜고 무전기로 통화하시는 모습은 안드레센 동화 속 이야기 같았다. 조명 아래 일지를 체크하시는 모습도 낭만 그 자체였다.
만약 이 날 지갑을 찾지 못했다면, 그 늦은 시간에 점주님께 연락을 드려야 했을 것이고, 그 뒷일은 상상하기도 싫다. 지갑을 잃어버린 순간 든 생각은 ‘왜 이렇게 사냐 진짜.’와 같은 자괴감이었다. 근데 한 시간 반 정도 810번 버스를 타고 종착역까지 갔다가 다시 집을 가는 동안 나는 ‘기사’라는 직업을 재정의할 수 있었다. 버스 기사는 낮에는 창 너머로 푸른 나무를 보며 사람들을 필요한 곳으로 데려다주고, 밤에는 가끔은 따스한 조명을 켜고 가로등 밑을 달리는 사람이었다. 가끔은 한 눈 팔린 사람들에게 신호를 주기도, 나같이 정신 팔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버스란 오늘도 수많은 일이 있었던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담긴, 낭만이 담긴 그런 곳이었다. 기사님은 그런 버스를 몰고 계셨다.
그 위태위태함에, 그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들에 기사님은 나를 버스에 태우셨을 것이다. 황OO 기사님. 이젠 810번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버스 번호판을 먼저 보게 된다. 그러고 나서 맨 앞자리에 어떤 분이 앉아계시는지 확인하게 된다. 기사님들 얼굴을 보게 될 때마다 그분 얼굴이 겹쳐 보이는 건 무슨 이유일까. 분명 다른 기사님들인데 그 얼굴들에 따뜻한 이웃이라는 정 한 장이, 버스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도와줄 것 같은 든든한 마음 한 장이 겹쳐 보인다.